필자는 외과 의사다. 그러나 진료실에서 하루 평균 100명이 넘는 환자들을 진료하지만 수술적 치료를 해줄 수 있는 환자는 기껏해야 10명 정도다. 나머지는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를 하며 환자의 환부 경과를 지켜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가끔씩 치료가 어려운 환자들을 만나곤 한다. 종합병원에 가서 CT, MRI 등 모든 검사를 해보았는데도 아무 이상이 없는 경우와 의사 처방으로 물리치료를 받고 약을 먹었는데도 전혀 차도가 없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심지어 원인 모를 증상이 수십년 된 환자도 있다. 이러한 경우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환자의 말을 최대한 열심히 들으며 증상을 확인하고 기본적인 검사를 하는 정도다. 의사로서 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음에 부족함을 느끼며 힘든 마음을 필자의 아내에게 털어놓기도 한다.
다 듣고 난 아내는 빙긋이 웃으며 말을 건넨다.
"당신은 아무것도 안 해주고 있는 게 아니지요. 환자 말을 열심히 들어주고 있잖아요. 마음이 열리고 믿음이 생기는 게 치료의 시작 아닐까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환자의 말을 단지 잘 들어주었을 뿐인데 환자들은 많이 좋아졌다며 다시 병원을 찾곤 한다.
필자에겐 여섯 살 된 아들놈이 있다. 그런데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 아토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내는 아이를 안고 동네 소아과부터 대학병원 소아과, 피부과, 한의원까지 좋다는 병원을 모조리 찾아나섰다. 그러나 병원에 갈 때마다 반복되는 수많은 검사들과 긴 대기 시간에 지치고, 아이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아내는 병원에서 주는 약과 연고를 거부하고 민간요법을 따랐다. 한여름에도 아이 목욕을 위해서 탱자를 푹푹 삶아 우려내 온 집안에 열기와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느 날 아이의 감기로 병원을 찾았을 때 동료의사가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아토피 치료를 권했다. 오랜 고민 끝에 아내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지금까지의 치료과정을 들은 소아과 의사는 아내에게 천천히 설명했다.
"미안하지만 모유수유를 끊어야겠어요. 그리고 앞으로 이런이런 치료를 할 거예요……."
아이는 꾸준히 치료를 받았고, 놀라울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아내와 소아과 의사처럼 의사와 환자가 서로 아름답게 교유하게 되는 심리적 기제를 '라뽀'라고 한다. 라뽀는 환자의 치료에 큰 도움이 되는데, 환자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경청은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 속내를 털어놓게 만들고, 말하는 사람은 말하는 과정을 통해 심리적 스트레스를 치유하는 경험을 한다.
오랜 치료 기간이 필요하고, 힘든 치료일수록 라뽀의 형성은 꼭 필요한 듯하다. 필자가 약과 수술로 치료하는 의사이기에 앞서 진심으로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친구이기를, 이웃이기를 다짐해 본다.
이영근
053)550-5000 trueyklee@yahoo.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
'어대명' 굳힐까, 발목 잡힐까…5월 1일 이재명 '운명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