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흑백 사진 속 아버지는 생전에 늘 온화하셨지만 한 가지 일에 대해선 크게 꾸짖으셨다. "소학교에서 배운 일본말이 튀어나올 때면 불호령이 떨어졌어요." 이언식(75·우창테크 대표)씨는 60여년 전 회초리를 든 선친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두꺼운 서류 뭉치를 꺼내든다. 1926년 신문자료. 당시 투옥된 독립투사를 다룬 기사가 빼곡하다. 이씨는 "신문자료를 통해 아버지 체취를 느낀다"며 "선친도 당시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투사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선친 이승해(1903∼1957)은 서울 중동고보(현 서울 중동 중·고교)에 다니다 퇴학당했다. 1919년부터 이듬해까지 항일학생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다. 3·1 독립운동(1919년)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서슬 퍼런 시절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낙향(경북 칠곡군 왜관읍 매원동)한 뒤에도 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서울을 왕래하며 독립운동가들과 접선하고 독립 자금을 전했다.
이내 요시찰 인물로 찍혀 일본 순사의 감시가 삼엄해졌다. 종손이란 무거운 멍에까지 짊어져 드러내 놓고 대의를 좇지 못했다. "수시로 허리에 긴 칼을 찬 순사들이 집을 찾아와 괴롭혀 할머니가 다락방에 숨곤 했어요."
당시 선친은 계몽 운동에 매진했다. 천석지기, 80칸이 넘던 종갓집 한쪽에 야학을 설치하고 일가 친척들과 동네 주민들을 가르쳤다. 이씨는 "야학을 통해 한집안, 한동네에서 독립투사 다섯명을 배출했다"며 '1939년(소화 14년) 대구지검 형사 사건부, 경북 칠곡군 왜관읍 매원동 이이석, 이두석, 이달영, 이승택, 이수목…'이란 내용이 담긴 증명 서류를 내보였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에 대한 독립운동 발자취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항일 운동을 펼치다 퇴학당했다는 학생부 기록도 너무 오래전 일이라 남아있지 않았다. 군청, 지검, 법원 등의 기록도 같은 이유로 찾지 못했다.
이후 이씨는 선친과 함께 항일 운동에 가담한 독립투사 후손들의 증언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서서히 선친의 행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중동고보를 함께 다니던 독립투사 후손들과 주민들이 전하던 선친은 분명 애국지사였다.
중동학교 재학시절 함께 독립운동을 한 안호상 박사(초대 문교부 장관), 변영태(외무부 장관), 전진한(사회부 장관)씨 등 10여명이 한복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찍은 사진 등을 찾았고, 이 중 안 박사 후손을 통해 선친이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퇴학처분을 당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1930년대 창씨개명에도 선친이 일절 응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마을 주민들 사이에 파다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제가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습니까? 아버지의 발자취를 찾아 후손에게 물려주는 게 제 평생 마지막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임상준기자 new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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