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 은사금 76명이 900억…致富발판 전국 땅 사재기
친일파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용어이다. 아무도 글자 풀이대로 '일본과 친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본사람과 친하다고 친일파라고 부르면 그 사람은 당장 화를 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친일파는 사회적 또는 관용적 용어로 일본의 이익을 위해 적극 협력한 자들을 일컫는다. 반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길잡이를 한 조선인들을 친일파라 부르지는 않는다. 그들은 '왜향도(倭嚮導)'라 부른다. 일본의 이익과 요구를 위해 적극 협력했더라도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등장한 부류만 친일파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친일파는 역사적 개념이다.
대개 학계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 앞뒤의 시기부터 1945년 8·15 해방 시기에 일본제국주의의 불법적 국권 침탈(식민지화 과정)과 강압적 식민통치,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과 1942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반인륜적 대외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인물들'을 친일파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친일파의 부류는 다양하다. 일본제국주의의 요구와 이익이 달라 친일파도 각각의 시기에 다르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1910년 8월 경술국치까지 등장한 다양한 친일 군상 가운데 핵심 부류는 매국형 친일파들이다. 이때 일본제국주의의 본질적 요구는 조선의 식민지화였다. 이 요구에 대응하는 친일파가 매국형 친일파다. 대한제국 말 한일합방 청원운동을 벌였던 일진회(一進會)의 이용구나 이른바 을사5적(1905년), 정미7적(1907년), 경술국적(1910년) 등으로 불리며 매국조약에 가담한 조정의 고위 관리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망국 뒤 일제로부터 조선 귀족의 작위를 받고 이른바 '병합은사금'을 받았다.
일제의 작위를 받은 조정의 고위 대신과 각종 매국조약 가담자는 64명이다. 이지용·송병준·이완용·박영효·민영린·윤덕영·이윤용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더라도 이를 반납한 유길준이나, 해외로 망명해 항일운동에 참가한 김기진, 3·1운동 등을 지지해 작위 자격을 박탈당한 김윤식 등은 제외한다. 매국형 친일파들은 '어차피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고 러시아나 일본의 식민지가 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해 병탄 조약에 가담했다'는 논리를 갖고 있다. 아래에서는 의병전쟁이 용솟음치던 때에 일국의 대신들이 나서서 독립불능론과 망국필연론을 들고 나와 나라를 팔아넘긴 것이다. 또 "조선은 독립할 능력이 없으니 일본과 합병한 뒤 나중에 실력을 키워 독립을 꾀한다"는 '실력양성론'도 등장했다. 늑대의 뱃속에 스스로 들어갔다가 우량아가 되어서 나오자는 궤변이라 하겠다.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은사금과 조선 귀족의 작위를 받았다. 대부분 조선총독부의 최고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찬의·부찬의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논리로 일본의 병탄을 미화하든 백성은 일본의 노예가 됐다. 조선 백성은 망국의 대가로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이들은 매국의 대가로 돈과 명예, 권력을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매국이 출세의 기회가 된 것', 이것만이 그들의 진실이다.
이들이 받은 은사금 총액은 당시 605만4천원이다. 반납자를 포함해 모두 76명이 받았다. 현재의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900억원 안팎이다. 원금의 5%를 연이자로 받았으니 매년 이들의 이자 수입 총액은 대략 45억원이다. 이완용의 경우 은사금 원금이 10만원이므로 대략 지금의 15억원에 해당한다. 연 5% 이자를 적용하면 1년에 7천500만원 정도의 이자 수입을 앉아서 번 셈이다. 여기에다 대한제국 관리를 역임한 대가로 받은 거액의 퇴직금에 중추원 부의장 회의 수당 등을 합하면 졸지에 돈벼락을 맞은 셈이다. 그들은 나라를 판 대가로 받은 이 돈으로 재산 늘리기에 나섰다. 약삭빠른 이들은 은행에 투자하거나 기업 설립에 참가했고, 일부는 탕진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손쉬운 치부책은 땅투기였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땅 사재기에 나섰다. 때마침 진행된 토지조사사업과 발맞춰, 이완용만 하더라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몇 년 전 송병준의 소유로 밝혀져 관심을 불러일으킨 부평의 미군기지 43만㎡(13만평)도 바로 매국의 대가로 치부한 것이다. 더구나 그 은사금이란 것도 일본이 주는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이 주는 것이었다. 바로 헐벗은 망국의 백성의 세금이었다.
반면 항일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실상은 비참했다.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충청도 지역 항일운동가 후손 가운데 60%가 고졸 이하의 학력에다 직업도 없이 사회의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해외 망명으로 자손들을 건사할 수 없었거니와 대부분 재산을 독립운동에 다 써버렸다. 또 독립운동가들이 옥사·병사·타살되면서 그 자손이 고아로 자란 탓이었다. 친일을 하면 삼대가 흥하고 항일을 하면 삼대가 망한다는 말이 사실이 되고 만 셈이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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