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500일의 썸머

입력 2010-01-23 07:33:29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500인간의 사랑…그 끝은?

사랑은 운명일까, 우연일까.

누구에게는 운명이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우연일 수가 있다. 차이가 있다면, 사랑이 이어지면 운명이고, 사랑이 깨지면 스치다 만난 우연일 터. 온 세상은 사랑으로 이뤄져 있고, 이 시간에도 그 놈의 사랑 때문에 가슴 아픈 이들이 많을 것이다. 사랑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흥미로운 비평서 같은 영화가 '500일의 썸머'이다.

이 영화는 이런 자막으로 시작된다. '이 영화는 허구다. 등장 인물과 닮은 사람이 있어도 그것은 우연일 뿐이다. 특히 너, 제니 벡맨. 죽일 X'. 아무래도 사랑의 홍역을 앓은 이가 이야기를 만든 모양이다.

각종 기념일의 감사 카드를 만드는 회사의 톰(조셉 고든 레빗). 따분한 일상에서도 늘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남자다. 그것은 어릴 때 슬픈 영국 팝과 '졸업'이란 영화의 로맨스에 반한 덕분이다.

500일 사랑기(記)의 첫 날. 그날 운명적 여인이 나타난다. 회사 사장의 비서로 온 썸머 핀(주이 데샤넬). 그녀는 평균 키에 평균 몸무게, 발 사이즈만 조금 클 뿐 평균치의 여성이다. 그러나 톰과 달리 운명적 사랑은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런 둘이 친구와 이성의 경계를 오가며 데이트를 시작한다.

이 영화는 500일의 앞뒤를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488일째에서 1일째로, 다시 290일째로 넘어갔다가 34일째로…. 시시각각 변하는 사랑의 감정에 맞춰 그 실체를 드러내 보여준다. 사랑의 감정이란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팥죽 끓듯 한다. 곧 죽을 듯 실의에 빠졌다가도, 문자 하나에 삼손의 머리카락처럼 힘을 받아 기뻐 날뛰는 것이다.

사랑 시작 34일째, 쇼핑몰 가정용품 코너에서 둘은 주방과 침실을 오가며 부부놀이를 한다. 어디 있다가 이제 왔냐는 듯 알콩달콩. 154일째, 모든 것이 환상적이다. 입술에 침 묻히는 버릇과, 가지런한 무릎, 심지어 목에 있는 점도 하트 모양으로 사랑스럽다. 그러나 290일째, 죽고만 싶다. 세상이 끝난 것 같다. 지구가 폭발했으면 싶다.

이 영화는 숱한 사랑의 환상, 소위 결혼으로 골인한다거나, 더 큰 사랑의 바다에 빠지는 따위의 무책임(?)한 발언은 삼간다.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졸업'에서 일레나(캐서린 로스)와 벤(더스틴 호프만)이 결혼식장을 빠져나왔을 때, 둘은 행복했다. 그러나 미래는? 가문의 든든한 백을 차버리고, 오직 사랑만 추구했던 둘은 이제 아무런 도움도 없이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얼마나 불안할까. '졸업'은 함께 웃던 일레나와 벤이 어두운 표정으로 변하면서 끝이 난다.

'500일의 썸머'는 처음 시작할 때 어린 톰이 '졸업'(1967년)의 로맨스를 오해했다고 내레이션으로 설명한다. 사랑의 환상적인 결말만 본 것이다. 11일째, '졸업'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썸머의 모습은 톰과 확연히 다르다. 톰이 의례적인 인사말이 아닌 진정한 뜻이 담긴 감사 카드를 만들어야 한다며 사표를 내는 것도 우리가 얼마나 교과서적인 사랑의 사이클에 빠져 있었는지, 또 그가 얼마나 사랑에 대해 대오각성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500일간, 1년 반의 사랑. 더 깊이 빠지지도 않고, 다시 시작할 여지도 있을 정도의 기간이다. 그리고 충분히 성장할 기간이다. 이 영화가 '남자와 여자가 만난 이야기지만,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고 부인한 것은 남녀의 관계, 또는 사랑의 감정을 통해 한 사람이 성장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의도일 것이다.

공원에서 '페니스!'라고 고함지르는 썸머역의 주이 데샤넬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연기와 늘 고민스런 표정으로 마치 요절한 배우 히스 레저 같은 인상을 보여준 조셉 고든 레빗의 연기가 매력적이다.

특히 이 영화는 샐러드의 드레싱처럼 다양한 음악들이 녹아들어 스토리를 더욱 맛깔스럽게 한다. 시퀀스마다 다른 노래들을 등장시키고,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인 펑크밴드 시드와 낸시의 에피소드를 끌어와 둘의 관계를 얘기하는 등 음악의 비중이 크다. 둘이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나오는 영국 밴드 스미스(The Smith) 등 O.S.T 음반을 사야할 정도로 음악들이 좋다.

감독 마크 웹은 얼마전 내한 공연했던 그린 데이 등 록 밴드의 뮤직 비디오를 주로 찍었으며 이 영화로 장편 데뷔했다.

달콤한 스토리에 목을 매느라 호소력이 없었던 기존 영화들과 격을 달리하는 로맨틱 코미디다. 썸머(여름)를 만났으니, 다음에는 오텀(가을)을 만날 차례인가? 영화로 확인해 보시길….

김중기 객원기자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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