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여기 손이 있다

입력 2010-01-15 11:01:37

손은 무엇인가? 길 안내판에 가끔 손이, 검지 손가락 화살표가 그려져 있으니, 손은 길, 즉 길 안내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나는 가끔 내 손바닥을 펴놓고 손금을 들여다본다. 물론 손금은 내가 어머니 자궁 속에서부터 주먹 지어 만든 살주름의 표시겠지만 예사롭지 않다. 내가 가야 할 길이 거기 그려져 있는 것 같아 한참을 들여다본다. 손은 길이다. 내가 너에게 "반갑습니다." 하고 먼저 악수를 청하듯, 내가 네게로 가는 길이 바로 거기 있다. 그리고 손은 바로 그 사람이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사람이, 내가 존경하는 몇 사람이 그분의 손을 보여주면서 내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오래 전에, 명사들의 인물사진첩에서 만난 박경리 선생님의 아주 커다란 손, 선생님은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얼굴의 입 주변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그 놀란 눈과 쭈글쭈글한 손등이 인상적이었다. 오늘의 볼썽사나운 현실 앞에 얼떨결에 입으로 올라간 손은 바로 그 입(말과 물질)의 경계를 지시하는 한편 그분의 몸을 아끼지 않는 실천적 삶을 보여주었다. 박경리 선생님은 그 손으로 '토지'와 '김 약국의 딸들'을 쓰고 채전을 가꾸며, 쓰레기를 적게 내보내기 위한 친환경적 삶을 실천하셨다. 늙은 몸을 이끌고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며, 땅바닥에 퍼질러앉은 듯 자신의 몸과 고추 자루를 동시에 끌고 다니시며, 땅과 하나되어 흘리시던 땀을 잊을 수가 없다. 그 고추 농사는 다름 아닌 토지문학관에서 작품을 쓰고 있는 후배들의 저녁 찬거리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일찍이 영화배우 윤정희의 손도 보았다. 1970년대 그녀가 황금기를 누릴 때, 그녀는 일을 많이 해서 예쁘지 않은 그녀의 손을 숨기지 않고 내놓았다. 톱 배우로서 그것은 용기였고, 그것으로 나는 그녀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인 김남조 선생님의 손. 선생님은 너무나 많은 사랑시로 유명하신 분인데, "우리 부부는 노동자였어요. 그렇게 서로 바빠서 사랑도 못 나누고 그 분을 보냈어요." 라고 말할 때, "사람이 사랑스러우려면 서로가 사랑받을 수 있게, 스스로 사랑스러운 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만히 있어도 내가 사랑스러워 상대가 쉽게 사랑할 수 있도록 되어지는 것"이 사랑에서 중요하다고 말할 때, 또 어느 잡지에 소개된 나를 보고 "가끔 행사 때 보면 맨 뒷자리에 서 있다 인사만 하고 가던 그 시인이 아니냐"고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와서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실 때, 대구시인협회장을 지낼 때도 따뜻한 말씀을 해 주시던 것을 기억할 때, 문단의 어른으로서 나는 그분의 사랑시가 더 이상 사치스럽지 않고 진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귀족적이지 않은, 사랑의 큰 시인으로 그분의 넉넉한 손이 느껴졌다. 선생님의 사부님인 김세중 교수는 과천국립현대미술관 초대 관장직을 맡아 그 큰 건물을 짓느라 수고하시다가 준공을 얼마 앞두고 과로로 쓰러지셨다.

물론 먹물이 더 진하게 배었겠지만 고구마의 잔뿌리와 흙을 터시는 생전의 시아버님의 주름진 손은 마침 막내며느리인 내게 보낼 고구마를 상자에 담고 있는 중이어서 더욱 잊지 못한다. 늘 밭에 나가 허리를 굽히시며 호미 자루를 잡던 어머니의 심줄이 퍼렇게 불거져 나온 손, 그 못난 손들은 모두 사랑으로 이어져 있다.

내가 은사인 데오도라 수녀님을 뵈러 신암성당에 갔을 때, 손수 가꾼 성당 뒷마당의 어린 채소를 뽑아주며 "줄 것이 있으니 참으로 기쁘구나." 하시던 그분의 손도 잊지 못한다. 또, 밀레의 그림에 나오는 엄마의 손은 딸에게 빵 접시를 안겨 삐죽이 열린 문 밖의 거지에게로 보내고 있어 얼마나 감동적이던가? 문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과 어둑한 실내에 서있는 모녀의 상체를 물들이던 붉은 색상은 또 얼마나 성스럽던가?

경주 남산 약수골 산비알에는 8.6미터의 거대한 마애여래대불입상이 있다. 두상이 떨어져 나가 가슴에 얹은, 한쪽 손이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불상인데, 내게는 그 자체로 완벽해 보였다. 그 손을 얼굴인 양 한참을 쳐다보았다. 부처님의 상호가 바로 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엄지와 중지를 살짝 맞댄 다섯 손가락의 선 하나하나가 이제 막 벌어지는 난초꽃 같았다. 난초꽃 향내가 다 났다. 그 손은 바로 온 세상 울음을 다 듣고 알고 있는 부처님 가슴에서 나온 자비의 손으로 이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 치유의 손이었다. 사랑의 실천을 다짐하는 큰 손이었다.

박정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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