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장길산·홍길동…정말 의적 맞을까?

입력 2010-01-13 11:59:01

만들어진 조선의 영웅들/이희근 지음/평사리 펴냄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 친아버지였지만 어머니가 정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대 상황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임꺽정, 장길산, 홍길동은 강도요 도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적을 도적이라 부르지 않고 의적이라 부른다. 홍경래는 농민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 자기네들 주도의 새 왕조를 만들기 위해 궐기했다. '양반전'을 통해 신분제 타파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박지원은 철저한 신분체제 옹호자, 선민사상에 도취한 사람이었다.

도적은 어떻게 의적이 됐고, 권력욕에서 비롯된 항쟁은 어째서 해방을 위한 항쟁처럼 비쳐졌을까. 선민사상에 도취돼 있던 사람은 어떻게 신분해방론자가 됐을까.

조선시대 대표적 도둑 3인을 영웅으로 바꾸는 데는 홍명희의 '임꺽정', 황석영의 '장길산' 허균의 '홍길동전' 등 소설의 힘이 컸다. 소설은 흔히 시대정신과 민심을 반영한다. 부패한 사회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가 영웅을 만든 것이다. 탐관오리에 시달리거나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던 백성들은 의적의 출현, 현재적 고통을 일거에 없애줄 영웅을 갈구했다. 그 바람이 한갓 도적을 의적으로 탄생시킨 배경이었다. 작가 홍명희에게 '임꺽정'은 식민지 체제의 모순을 폭로하는 수단이었고, 황석영의 장길산 역시 어두운 시대를 통과하는 힘없는 백성의 자기위안이었다.

그러면 임꺽정은 어떤 도적이었나.

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개인적으로 소와 말을 도축하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했다. 아울러 정착 농민을 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 세금을 더 걷기 위해 유랑민을 없애려고 했다. 여행을 하자면 여행허가증인 행장을 발급받아야 했다. 나라에서 유랑과 도축을 지속적으로 단속하자, 백정들과 재인은 자신들의 본업인 도축과 유랑만으로도 범법자가 됐다. 임꺽정과 같은 무리는 정착하는 대신 전통적인 생활을 고수했고, 따라서 도적이 됐다.

임꺽정은 관아를 침범하기도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들을 체포한 관리들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신분제에 대한 저항은 아니었다. 백성들이 그들을 신고하지 않았던 것은 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복수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임꺽정의 무리는 고발한 자를 철저하게 응징했다.

장길산은 어땠을까.

조선 숙종 때는 전국 각지에서 도적이 창궐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백성들은 부패한 벼슬아치와 양반의 수탈, 횡포로 농토를 빼앗기고 떠돌아다니거나 도적이 됐다. 장길산은 이런 세월 속에 등장했던 도적 중 하나였다. 역사 기록 어디에도 장길산이 새 세상을 꿈꾸었던 의적임을 입증하는 증거는 없다. 다만 이영창이라는 인물이 서울의 양반서얼과 노비 출신들을 모아 역모를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장길산과 연결됐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모두 허구로 밝혀졌다. 이영창은 장길산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으며, 단지 자신의 계획을 과장하기 위해 장길산의 이름을 들먹였던 것이다. 조선 전기의 도적 홍길동 역시 활빈당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없다. 다만 조선 후기에 부패한 정치에 좌절한 백성들이 홍길동을 의적으로 변화시켜 대리만족을 얻었던 것이다.

'홍경래의 난' 지도부는 정감록에 따라 정씨 왕조를 세우겠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농민이 주체가 되는 나라가 아니라 또 다른 정치 엘리트에 의해 지배되는 왕조체제를 원했을 뿐이다. 홍경래의 난은 민심의 폭발이 아니었고, 따라서 참여자들의 전투 의지는 약했다.

홍경래 등 지도부는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1전-3전씩 선금을 주고 군사를 모집했다. 걸인, 소상인, 마부 등 여러 직업군이 이에 응했다. 반란 목적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호구지책으로 합세한 것이다. 홍경래는 식량을 주는 조건으로 반란군을 모집하거나, 협박을 통해 강제로 징병했다. 그런 점에서 홍경래의 난은 농민운동이나 농민 주체의 반란이 아니었다.

연암 박지원은 흔히 '계급타파, 형식주의 타파, 반봉건, 양반의 위선 폭로' 등으로 높게 평가받으며 신분 해방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박지원은 결코 '신분 해방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선비라는 것은 하늘이 준 작위이니, 선비의 마음은 지(志)이어야 한다. 지란 어떠한 것인가. 권세와 이익을 꾀하지 말아야 하니, 현달하더라도 선비의 본분에서 떠나지 말아야 하며 곤궁하더라도 선비의 본분을 잃지 말아야 한다. (중략) 문벌을 재물로 삼아서 가문을 파고 사고하니 장사치와 무엇이 다르리오'라고 했다.

그의 생각을 정리하면 이렇다. 양반 신분은 하늘이 내린 지위이니 양반은 더욱 양반답게 살아야 한다. 돈을 받고 신분을 파는 자나, 돈으로 신분을 사는 자는 천한 자일뿐이다. 오직 학문을 열심히 닦는 자만이 양반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 박지원은 뼛속 깊이 선민사상을 간직한 인물이었다.

책은 이 외에 전봉준, 흥선대원군 등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176쪽, 1만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