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미술 산책] 설경

입력 2010-01-09 07:33:59

점점 줄어드는 길·담장…깊이 있는 화면

눈 온 다음날의 마을 풍경, 소허 서동진의

작가: 徐東辰(1900~1970)

제작연도: 1920년대 말

재료: 종이 위에 수채

크기: 45.5 × 61㎝

소장: 개인(서복섭) 소장

아직 개지 않은 잿빛 하늘이 낮게 드리워져 있고 뽀얗게 변한 산도 한층 가깝게 다가와 보인다. 온동네가 새하얗게 변해있는 겨울 아침, 길에도 지붕에도 꽁꽁 언 도랑의 얼음위에도 수북이 쌓인 눈으로 마을이 온통 흰빛에 잠겨 있다. 인적이 드문 길에는 등에 아이를 업은 여인인 듯 방한용 덮개를 둘러쓴 행인 한 사람과 그 뒤로 보이는 치마저고리 차림의 어린사람 두 명이 고작이다. 길게 땋은 머리에 붉은 댕기를 맨 소녀의 모습과 통나무 전봇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우뚝 서있는 키 큰 감나무 한 그루가 눈 속의 세한(歲寒) 추위를 암시하지만 한 시대를 훌쩍 넘은 지금에도 별로 낯설지 않고 정겹게 느껴진다.

이 작품을 그린 소허 서동진(小虛 徐東辰)은 1927년 45점의 수채화를 가지고 대구 조양회관에서 첫 수채화 전람회를 개최한 신미술의 선구자다. 서양화가 이 땅에 들어온 지 아직 얼마 안 되었지만 이 청년 작가는 벌써 당시 새로운 매체에 훌륭하게 적응했음을 이 그림이 잘 보여준다. 수목의 종류에 따라 특징 있게 묘사된 다양한 나무들의 표현도 이채롭고, 소복이 눈을 인 초가지붕들 너머 아담한 담장을 두른 기와집의 붉은 벽돌 굴뚝도 눈에 띤다.

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는 무엇보다 색채의 역할이 크다. 하늘빛에서부터 냇물의 얼음 빛까지 채색에 의한 통일감이 전 화면을 지배한다. 자극적인 효과를 겨냥한 과장된 대비 하나 없이 전체적인 인상이 너무나 순하고 부드럽다. 그러면서도 풍부한 색조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어 결코 단조롭지 않은데, 여인이 쓰고 가는 남색 옷의 푸른빛이나 간신히 알아볼 정도지만 얼굴색과 소녀의 댕기와 가슴에 안은 보자기 등의 연한 붉은색에서 또 감나무의 특징을 멋지게 살린 가지 묘사에서 세부와 부분강조에도 세심함이 돋보여 화면에 생기가 돈다. 마치 수묵화를 다루듯 즉시에 완성한 물감과 붓을 쓰는 솜씨가 빼어난다.

수채화는 유화에 비해 경쾌함은 있으나 깊이감 있는 묘사가 어렵다. 그래서 명암법이나 채색에 의한 심오함을 추구하기보다는 대각선의 선 구도에 의한 원근표현을 잘 이용한다. 점점 줄어드는 길의 폭이나 담장의 높이, 전신주의 길이 등으로도 원근은 충분히 지각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의 가운데 지그재그로 난 길을 따라 단계적으로 유도되는 시선은 자연스럽게 소실점을 향하게 되며 곧 화면에 깊이를 만든다. 또 좌우로 균형 있게 나뉜 배치들은 안정감과 변화를 동시에 부여하는 전형적인 수채화의 소재다.

전방에 보이는 산은 대구 사람들에게 무척 낯익은 앞산의 모습이다. 서동진은 개울로 양편이 나누어진 이런 마을 풍경을 한두 점 더 남기고 있는데, 거의 같은 지점에서 바라본 풍경임에 틀림이 없는 이란 작품과 또 두 여인이 빨래를 하는 모습이 담긴 이 있다.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땅 밑에 묻혔지만 예전에 범어동이나 계산동 동산 근처에도 도랑이 흘렀다. 이런 동네의 소경(小景)을 여러 차례 그렸으니 그 어디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확한 장소와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928년과 1931년에 열린 전시 출품목록에서 '설경'과 '눈 온 다음날'(雪의 翌)이란 제목을 발견할 수 있는데 아마도 그 즈음일 것이다. 구도나 채색의 수준이 그의 수채화가 한창 성숙한 기량을 발휘할 무렵이다. 그림 우측 하단에 서명의 흔적이 있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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