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지사들은 자신을 깨끗이 간직한 채 운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택했다. 각자 처지와 입장에 따라 단식, 음독, 할복, 권총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이들 가운데 경북 영양 출신의 김도현(金道鉉) 의병장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특이한 사례를 남겼다. 이른바 '도해(蹈海)', 걸어서 바다 속으로 들어가 순국했던 것이다.
1852년 영양 청기에서 태어난 김도현은 1895년 음력 11월 단발령을 계기로 1차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그뒤 1905년 11월 을사늑약 때는 직접 서울로 올라가 반대투쟁을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자 고향으로 내려와 재차 의병을 일으켰지만 또다시 패산하고 말았다. 항일투쟁으로 일관하던 김도현 의병장은 곧이어 닥친 1910년의 국치로 인해 삶의 의미를 잃고 말았다. 도덕적 양심과 의리에 철저했던 그의 의식세계는 일제강점을 용인하거나 외면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노부모가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의미없는 삶을 하루하루 연장해 갔다.
국치 뒤 4년, 김도현은 마침내 친상(親喪)을 치렀다.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상례를 마친 즉시 고향 집을 떠나 현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동해안의 대진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주저없이 동해바다 속으로 걸어서 들어가 자정하였다. 의병의 거룩한 최후 모습이었다. 그 날이 1914년 12월 23일(음 11.7) 동지로, 그의 나이 64세때였다.
현재 대진해수욕장 해안가에는 그의 자정순국을 기리는 '도해단(蹈海壇)'이 서 있고, 여기에는 순국 전날 대진 산수암(汕水巖)에서 지은 절명시가 새겨져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오백년 선말(鮮末)에 태어나(我生五百末)/ 붉은 피 전신에 어리어(赤血滿空腸) / 중년의 항일 19년에(中間十九載) / 터럭은 추상처럼 변했구나(鬢髮老秋霜) / 국망에 눈물은 마르지 않고(國亡淚未已)/ 친상에 마음은 더욱 상한다(親沒心更傷) / 홀로 서 있는 옛산은 푸른데(獨立故山碧) / 아무런 방도가 없으니(百計無一方)/ 만 리 먼 바다가 보고파라(萬里欲觀海)/ 7일이 양을 회복하는 동지이니(七日當復陽) / 희고 흰 천 장 물결이(白白千丈水)/ 족히 내 한 몸 간직하겠구나(足吾一身藏)
댓글 많은 뉴스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