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가 담은 메시지는 뭘까?

입력 2008-09-27 06:00:00

세상의 관심을 갈망해 선택한 역설적 자기표현

베이징올림픽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인 9월 첫 화제를 장식한 뉴스는 탤런트 안재환의 자살 사건이었다. 그는 '국민 여러분, 선희에게 잘 해주세요' '선희야, 사랑해. 빨리 발견되면 장기 기증할게. 부모님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겼다. 지난 18일 오전에는 대구 지하철 2호선 경대병원역에서 60대 남자가 선로에 뛰어내려 전동차에 치여 숨졌다. 그는 유족들에게 '잘 살아라'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비록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죽음'을 택했지만 자살자들은 유서를 통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소극적으로나마 알리는 행위를 한다. 생의 마지막 끈을 스스로 놓음에도 세상과 소통하는 끈은 미약하나마 남겨두는 것이다. 형사정책연구원의 박형민 전문연구원은 이러한 자살을 '소통적 자살'이라 규정하고 "주변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의사 소통의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박 연구원은 지난달 공개된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학위 논문 '자살행위의 성찰성과 소통지향성'에서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자살자가 남긴 유서 405건을 분석했다. 자살자들은 유서를 통해 도대체 어떤 말을 전하고 있을까?

◆세상에 남긴 끈 '유서'

지난 2005년 자살한 38세 여성의 경우 유서에 부정적 정서로 심한 분노를 표현했다. 그녀는 평소 배우자와 생활비 문제로 자주 다퉜고, 배우자가 직장일을 핑계로 자주 집을 비웠으며, 부부가 각방을 사용했었다고 한다. '같잖은 이중 인격자… 나쁜X 나쁜 X 이중인격자 X새끼… 가정에서는 빵점이야!'가 그녀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자살하려는 상황에 계획적인 측면이 보이는 유서도 있다. 지난 2002년 사망한 46세 택시기사는 '12월까지 인수중지하였다 계산하여서 수금하여라… 미안하지만 재혼하여서 살기를 바란다. 너 혼자 살기가 힘들거라는 것은 내가 더 잘 안다. 전화번호 변경하여라'며 세세한 것 하나까지 지시했다. 곗돈을 사기당한 뒤 1999년 자살한 33세 여성은 공권력에 문제 해결을 바랐다. '이 편지가 (경찰)서장님 손에 있으시면 저의 이 사연을 해결해 주었으면 합니다. 너무 억울 하답니다. …이 돈을 찾거나 받으면 제가 빌린 분들게 다 갚아주라고 저의 남편에게 주십시오. 저를 보고 돈 준분들께 너무 죄송합니다. 그래야 억울하게 죽은 제가 눈을 감을 것 같아서요. 서장님 감사합니다.'

지난 2003년 9월 3일 자살한 49세 가정주부의 문제 상황은 남편의 과다한 신용카드사용과 폭력, 그리고 외도였다. 이로 인한 다툼 끝에 그녀는 사건 당일 잠들어 있는 남편에게 끓는 식용유를 부어 전신화상을 입히고는 13세인 자신의 딸과 함께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했다. 그녀는 유서에 '내 여린마음도 이제는 독이 오르는군요. 나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 짐승모습으로 만들어 주어야'라는 식으로 남편의 나쁜 행실에 대해 저주를 퍼부었다. 내연녀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와 심부름센터를 통해 찍은 외도장면도 언급했다. 문제의 원인이 남편에게 있다고 보고 이를 자살로써 알리고는 남편이 이를 평생토록 기억하게 하는 일종의 복수였던 셈이다.

◆죽어도 놓칠수 없는 끈 '가족'

유서에는 가족에 대한 염려와 배려가 많이 등장한다. 유서 수신인으로는 ▷자녀(31.8%) ▷배우자(25.1%) ▷부모(24.6%) ▷형제(18.2%) 순으로 많이 지목됐다. 불특정인을 향한 것도 28.6%나 됐다.

지난 2001년 자살한 35세 남성은 '정말 미안하다. 아빠가 이럴 수밖에 없는 걸 너희들은 알아주고 아빠가 죽더라도 너희 옆에 항상 너희하고 있는 거야'라고 적었다. 그는 자신과 딸의 생일이지만 딸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상황을 비관해 자살을 택했다. 지난 1998년 숨진 47세 남성도 아내에게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난 당신 참말로 사랑하고 아끼고 싶었소. 하지만 돈 때문에 항상 당신을 고달프게 하였죠. 죽어서도 꼭 당신께 평안과 행복을 기원하겠소'라는 유서를 남겼다.

2003년 사망한 42세 남성의 마음은 어머니로 향했다. 그의 유서에는 '어머니께 올립니다. 항상 근심 걱정과 고통을 안겨드리는군요. 효도라는 글자체를 잊고 살아온것이 죄스럽습니다. …나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시거나 염려하지 마시고 어머님 건강만 챙기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자살자 본인은 보증 실패와 빚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으나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정서만 담았다.

60대 이상에서는 지병이나 생활고로 인해 자식에게 짐이 될까봐 걱정하는 내용이 많다. 지난 2004년 자살한 60세 여성은 '이대로 오래 살아서 자식들한테 큰 짐이나 되어 죽는 날까지 고생할까 생각하니 무섭고 숨이 막힌다. …그동안 너희들이 잘 보살펴 준 것을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류머티스성 관절염과 고혈압으로 고통받고 있어서 '자식들에게 큰 짐'이 되어 죄인같이 살아가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결심이었다.

이는 세상에 대한 비관이나 학교·부모에 대한 원망이 가득한 10대 자살자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유서에서 '부모님 죄송해요'라는 내용을 많이 볼 수 있다.

◆다양한 메시지가 동시에 표현

자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자살이라고 해서 모두 다 무조건 충동적인 행동만은 아니다. IMF 이후 자살자 수가 급증한 한국에서 자살은 더 이상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자살 사망자 증가율은 OECD 국가 중 1위. 지난해에만 1만2천여명(인구 10만명당 24.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는 하루 33명이 자살 대열에 합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자살을 막기 위한 체계적 접근법의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다. 박형민 연구원은 "자살 발생의 각 단계별로 적합한 개입 전략을 마련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오진탁 한림대 철학과 교수는 저서 '자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죽음'(세종서적)에서 '웰다잉(Well-dying) 교육을 통해 죽음과 자살을 올바르게 이해시키고 왜 자살해서는 안 되는지를 체계적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베르테르 효과'(유명인이나 자신이 모델로 삼고 있던 사람 등이 자살할 경우,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를 줄이기 위해 언론이 보도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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