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광장] 자녀를 한번 무조건 믿어보자

입력 2008-09-23 09:43:13

"이 자식아, 이 성적으로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못 간다구. 이 자식아, 너 이 다음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도 못 가고 저 멀리 지방대학으로 유학을 갈 셈이냐.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이는 작가 최인호가 쓴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라는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대학입시를 앞둔 아들이 형편없이 떨어진 성적표를 보여주자 불쑥 이렇게 언성을 높였다고 한다. 그는 아들에게 얼굴을 붉힌 게 겸연쩍어서인지 "이런 꾸중은 누구나의 집에서나 꼭 한마디씩 나오는 그런 통속적인 꾸중일 것"이라고 덧붙인다. 정말 그렇다. 중고생 자녀를 둔 아버지치고 이런 잔소리를 한두 번쯤 안 해본 아버지들이 있을까.

"너무 바빠서 도저히 아들을 돌볼 수 없다고 말하는 부유한 아버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는 사람을 사서 자기 의무를 그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돈에 눈이 어두운 인간들이여! 돈으로 아이에게 아버지를 사줄 수 있는가? 여러분이 자식에게 주는 것은 교사가 아니라 고용인일 뿐이다."

이 글은 장 자크 루소가 쓴 교육서의 고전인 '에밀'에 나온다. 루소는 교육철학자로 유명하지만 자신의 창작활동에 방해가 된다며 5명의 자녀를 고아원에 버렸다. 그러고도 부유한 아버지들이 자녀교육을 외면한다고 힐난한다. 자식을 버린 루소가 교육철학자가 된 것 역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슴에 와 닿는 자녀교육 비결은 교육철학서인 '에밀'에서가 아니라 최인호의 글에서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하숙을 치며 3남 3녀를 키워낸 어머니의 자녀교육 비결은 다름 아닌 맹목적일 정도의 '믿음'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는 지금껏 어머니에게 공부를 하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형도, 동생도, 누이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께서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성적표를 보자고 명령하신 적이 없었다. 우리 형제들 모두가 공부를 썩 잘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서울대에 들어간 형님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수학 과목에 20점을 맞은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교무실에 불려 다녀와서도 형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쉬엄쉬엄 하거라. 너무 애쓰지는 말아라.'"

최인호는 어머니가 신식교육을 받지 못해 유식하다거나 교육방법이 투철한 어머니가 아니셨지만 자식들이 하나의 신앙이셨고 그냥 맹목적으로 자식들을 믿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맹목적인 믿음은 결코 무관심하거나 방관적인 게 아니었다고 그는 말한다. 중3 때 학교에 어머니가 다녀가신 후 담임선생이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 어머니가 그러시던데, 너는 말이야 잘한다고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면서 좋은 말로 이끌어 줘야 말을 듣지, 꾸짖고 때리면 더 말을 안 듣는다고 하시던데 말이야."

반면 최인호는 자신의 두 아이에 대한 믿음은 어머니의 믿음을 당해내지 못한다고 토로한다. "자식들에 대한 아내와 나의 불신이 아이들을 괴롭히고 그들을 상처 입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요즘 여느 부모들의 모습이 아닐까.

흔히 인생에서 가장 뜻대로 안 되는 게 세 가지가 있는데, 바로 자식과 명리(名利), 수명이라고 한다. 명리와 수명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느 정도는 컨트롤할 수 있지만 자식만큼은 부모가 노력을 하더라도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부모들은 대부분 자녀들에게 "공부해라"라는 말을 달고 산다. 그게 부모의 마음이다. 하지만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많아질수록 자녀는 공부로부터 멀어지기 십상이다. 마치 돈에 매달리면 돈이 도망가듯이.

필자 역시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어머니에게서 단 한 번도 '공부하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런 어머니지만 네 아들을 대학에 보냈고 두 명은 박사학위를 받았다. 요즘에는 손자손녀들을 묵묵히 뒷바라지하고 계신다.

'로젠탈 효과'라는 게 있다. 교육심리학에서 타인의 기대나 관심을 받으면 재능에 상관없이 능률이 오르고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부모로부터 신뢰를 받고 자란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서도 신뢰를 받는 것이다. 이제부터 '공부하라' 소리 대신에 '쉬엄쉬엄 하라'며 아이를 맹목적일 정도로 믿어보자. 큰사람을 만드는 것은 돈이나 간섭이 아니라 부모의 믿음이 아닐까.

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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