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문의 펀펀야구] 부상 시련 이긴 강봉규

입력 2008-09-05 08:34:47

때론 신중한 부상관리가 미래를 좌우한다. 한순간의 사고가 평생의 운명을 바꾸듯 불현듯 닥친 부상이 인생의 날개를 꺾는다.

기본에 충실해 27년 동안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오랫 동안 선수 생활을 했던 '놀란 라이언'은 은퇴 후 회고했다. "돌이켜보면 부상 없이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큰 행운이었어." 그가 행운으로 표현한 의미는 운동세계에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불청객이 부상이기 때문이었다.

삼성 라이온즈의 강봉규는 타고난 힘이 대단했다. 또래에 비해 엄청난 괴력을 지녔던 그는 늘 4번 타자에 투수를 맡았고 경남고 시절 청소년대표로 뽑혀 4번 타자에 3루수로 활약했다. 고교 시절 이미 두산에 지명을 받았던 강봉규는 고려대로 진학해 1학년 때부터 시합에 나설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3루수에는 2년 선배인 김동주(현 두산)가 자리잡아 1루수로 뛰었지만 2학년 때부터는 3루수에 3번이나 5번 타자로 나섰고 국가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강인한 어깨에 장타를 선보였다.

그러나 잘 나가던 유망주에게 비틀린 운명의 서곡이 연주된 것은 3학년이었던 1998년 4월. 동대문구장에서 치른 연세대와의 경기에서 3루수로 나섰던 강봉규는 현재 팀 동료인 신명철이 친 타구가 고르지 않았던 흙더미에 튀어 불규칙 바운드가 되면서 왼쪽 눈을 정면으로 강타당했다. 다행히 눈 밑에 맞아 실명 위기는 피했지만 뼈가 부러지면서 보형물 삽입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오래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던 터라 열흘만에 퇴원해 훈련을 재개했고 대표팀에 합류해 고베 친선경기부터 한미 친선경기, 세계선수권대회와 아시안대회를 치르며 해를 넘겼는데 남은 것은 부상 후유증 뿐이었다. 퇴원 후 급한 마음에 무리하게 시작한 훈련이 손목 부상으로 이어졌다. 대표팀 활동을 하면서 참고 버틴 것이 화근이었다.

프로에 겨우 입단은 했지만 조금씩 적응할 만하면 재발하는 손목 부상 때문에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했고 2003년에는 어깨마저 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공을 던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몇 번이나 '야구를 그만 두어야 할까'하고 망설였지만 수술 후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1년간 재활훈련에 매달렸고 2005년 시즌엔 정말 마음 먹고 도전했지만 이번엔 체력 고갈로 버텨내지 못했다.

날개가 꺾였다는 생각이 들 즈음 2006년 3월 김창희와 함께 강동우와 트레이이드되어 삼성으로 왔다. 신기하게도 삼성에는 트레이너(트레이닝 코치 포함)가 많았다. 자연히 자신의 상태를 상의할 시간도 많이 갖게 되었고 트레이너와 함께 우선 몸만들기에 주력했다.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체계적인 훈련으로 몸 상태가 좋아지자 타격 훈련에 전념했다. 2007년 처음으로 170타석에 나서 2할8푼대를 기록했고 금년에는 111타석에 3할1푼을 기록했다.

매일밤 그는 홀로 스윙연습을 한다. 전력을 다한 스윙이 끝나면 10년이 걸렸던 어둡고 긴 부상의 터널을 지나온 지금의 순간에 감사한다.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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