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이 온정 펴는 '천사표 할아버지' 화제

입력 2008-09-04 08:26:54

"한가위인데, 배를 곯아서야 쓰나."

2일 오후 4시 대구 수성구 수성구민운동장. 수성구청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보내온 쌀을 복지관, 경로당 등으로 나눠주기 위한 작업에 한창일 때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10t 트럭 한 대가 도착했다. 짐칸에는 보기만 해도 넉넉하게 10㎏짜리 쌀 1천포대가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라." 한 차 가득 쌀을 싣고 온 주인공은 올해 89세의 할아버지. 그가 모습을 보이자 공무원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올해도 이렇게 쌀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6년째 매년 추석 즈음이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 달라"며 수성구청에 2천만원 상당의 쌀을 보내주는 할아버지가 있어 살맛나는 풍경을 만들고 있다. 2003년 20㎏짜리 쌀 500포대를 가져다준 것으로 시작된 그의 선행은 6년째 한해도 거르지 않고 진행 중이다.

할아버지는 결코 요란을 떠는 법이 없어 더 깊은 감동을 준다. 이름이나 사는 곳이라도 알려달라고 하면 손사래부터 친다. 구청 직원들과 마주하다 보니 얼굴은 알려지게 됐지만, 이름을 알리지 말라며 거듭 당부를 한다. 2일 구민운동장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구청의 요청이 있어서였다. 안 오겠다고 했지만 구청 직원이 자신을 데리러 올까봐 스스로 들렀다고 했다.

자신의 선행을 절대로 알리지 말라는 요구에 구청 공무원들은 그를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른다. 키가 160㎝도 안 되는 왜소한 체격이지만, 그의 선행은 동화 속의 '키다리 아저씨'와 닮았기 때문이다.

수성구청 이경수 서비스연계 담당은 "지난달 28일 전화를 해 대뜸 언제 가면 되냐고 물은 뒤, 올해도 어김없이 쌀을 보내주셨다"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남도. 한국전쟁으로 부산까지 피란을 갔다가 대구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고 한다. 생면부지의 대구에서 편할 날 없는 젊은 시절을 보냈다. 서문시장에서 양복지 도매상을 했다는 그는 시장에 불이 나 어려움에 처한 적도 많았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그때마다 시민들이 주머니를 털어 보내준 성금으로 힘을 낼 수 있었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이 담당은 말했다.

젊은 시절 받은 고마움 때문일까. 할아버지는 자신의 행동이 선행이 아닌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예전에 받은 것을 이제야 갚게 돼 자랑이 못 된다는 것. 지난해 겨울에는 홀로 사는 노인들이 걱정돼 연탄이라도 사라며 구청에 1천만원을 또다시 기부했다. 여생 동안 쌀 배달부가 되는 것이 할아버지의 바람이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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