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와 함께 떠나는 세계여행]말라위의 항구도시 '은카타베이'

입력 2008-09-04 06:00:00

"대체 왜들 이렇게 한가한 거야!"

하루 중 가장 무더운 오후 1시, 말라위의 작은 항구도시 은카타베이는 파리떼가 붕붕거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했다. 모두들 더위를 피해 낮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나는 괜스레 더 약이 올랐다. "대체 왜들 이렇게 한가한거야!" 나는 바람 한 점 없이 그림처럼 하늘에 붙어버린 파파야나무 꼭대기를 째려보며 소리를 꽥 질렀다.

사건의 발단은 한달 전 이 마을에서 만난 한 남자였다. "보름 안에 망고나무로 깎아만든 하마와 코끼리 2천마리가 필요해." 나는 이 하마와 코끼리들을 한국으로 보내야 했다. 곧 나올 아프리카 여행책의 출간이벤트에 하마와 코끼리 목걸이를 기념품으로 나눠주면 좋겠다는 출판사 측의 아이디어였다. "문제없어." 은카타베이 최고의 아티스트라고 자부하는 남자는 믿을만해 보였다. "대신 망고나무를 살 재료비 50만원만 미리 줘." 하마와 코끼리 2천마리를 주문한 비용은 총 100만원이었다. 시작도 안 했는데 50만원이나 미리 내준다는 것이 조금 찜찜했지만 '재료 살 돈이 없어 시작을 못한다'는 남자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약속한 보름 안에 꼭 2천마리를 만들어줘야 해!" 남자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한마디(당연하지!)를 외치고 돌아갔다.

일주일 후 남자는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다시 찾아왔다. "무슨 일 있니?" 내가 놀라서 묻자 남자는 실실 웃으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일은 무슨 일, 내가 한턱 쏘려고 왔지!" 남자는 몹시 행복해보였다. 그날 밤 남자는 내가 머물고 있던 게스트하우스 내 작은 맥주바의 모든 손님들에게 맥주 한 병씩을 사주고 돌아갔다. 나는 재료비도 없다고 울상짓던 남자가 왠일일까 싶어 마음이 불안해졌다.

약속한 보름 후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빈손이었다. "하마와 코끼리들은 왜 안 가지고 왔니?""재료비가 부족해서 다 못 만들었어. 나머지 50만원도 미리 주면 안 될까?" 어이가 없었다. 나는 당장 재료비로 준 50만원을 돌려주던가 하마와 코끼리 2천마리를 끌고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착하고 얌전한 말라위 여자들과는 달라! 만만하게 보다간 큰 코 다칠 줄 알아!" 전투태세에 돌입한 나의 으름장에 남자는 기가 죽어 돌아갔다. 과연 나는 하마와 코끼리 2천마리를 받아낼 수 있을까. 처음부터 남자를 너무 믿었던 것이 후회됐다.

그때부터 나의 은카타베이 장기체류가 시작됐다. 은카타베이는 작은 어촌 마을이지만 탄자니아·모잠비크 등 인근 나라에서 식량이 들어오고 나가는 말라위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이다. 그래서 특별한 볼거리는 없지만 늘 분주하고 활기찬 분위기를 지녀 말라위호수를 지나는 여행자들이 꼭 들르는 곳이다. 아침이면 생선시장과 버스터미널이 떠들썩해지면서 먹거리 노점상이 빽빽하게 들어서고 저녁이면 작은 나이트클럽들에서 레게음악이 신나게 연주된다. 하지만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하마와 코끼리들을 무작정 기다리며 꼼짝없이 은카타베이에 갇혀있어야 했던 나에겐 더 이상 이 마을이 흥미로울 수가 없었다. 나는 매일 씩씩거리며 남자의 작업장으로 찾아가 빚쟁이처럼 "하마랑 코끼리 빨리 내놔!"를 외쳐야 했다. 그러나 찾아갈 때마다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느긋한 목소리로 "하루만 더 기다려 봐."라는 말로 내 속을 긁었다.

은카타베이 마을의 언덕 아래엔 자칭 '아프리카 최고의 예술가'라고 자부하는 남자들이 모여 기념품으로 팔려나가는 조각작품들을 작업한다. 예술가들이 만들어 내는 하마·코끼리·사자·얼룩말 등 동물조각들 때문에 그들의 작업장은 마치 아프리카 밀림 속 같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한 여자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정지해버렸다. 그들은 조각칼을 내던지고 항구의 술집으로 몰려가 있었다.

내 잘못이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50만원이란 돈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돈인지를. 50만원을 받아든 순간 그들은 너무 행복해져서 보름 안에 하마와 코끼리를 2천마리나 만들어야 하는 일 따위는 금세 까맣게 잊어버렸고 대신 매일 밤 파티를 열기 시작했던 것. 그들에게 50만원은 평생 맥주를 마셔도 다 못 쓸 만큼 큰 돈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나는 50만원이 이 마을에 안겨준 행복을 따질 수 없었다. 보름이고 한달이고 하마와 코끼리들이 완성되기를 그저 기다릴 수 밖에.

한달이 넘어 나는 드디어 하마와 코끼리 2천마리가 가득 든 상자를 받았다. "한국 사람들에게 말해줘. 말라위의 은카타베이에 사는 아프리카 최고의 예술가들이 만든 작품이라고." 남자는 내게 상자를 안기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미 화도 낼 만큼 냈고 속도 상할 만큼 상했으므로 낑낑거리며 상자를 들고 온 남자의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느긋하고 행복한 얼굴 앞에서 나는 웃고 말았다.

미노(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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