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두진의 책속 인물 읽기]'소멸' 무라우

입력 2008-09-03 06:00:00

'나는 정말로 볼프스엑과 볼프스엑에 사는 식구들을 분해하고 해부하여 소멸시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 자신도 분해하고 해부하여 소멸시키지요, 그런데 나 자신을 분해하고 소멸시킨다는 생각을 하면 아주 기분이 좋아집니다. (중략)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확실하게 날 분해하고 소멸시키는 일입니다.'

30년 전 고향 볼프스엑을 떠나 로마에서 독일 문학을 가르치며 사는 나(프란츠 요셉 무라우)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치르고 돌아오자마자 부모와 형의 부음을 받는다. 나는 부모와 형의 사진을 보며 볼프스엑을 떠올린다. 볼프스엑으로 대변되는 고향과 가족, 조국 오스트리아는 내게 악몽이다. 나는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고 그래서 '소멸'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는 중이다.

고향 볼프스엑에 만연하는 것은 비정신이고 그 중심에는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는 비정신의 화신이며 나치즘의 아성이다.(여기서 소멸 혹은 청산돼야 할 볼프스엑은 어머니의 땅이자 오스트리아일 수 있고, 한국일 수 있고, 미국일 수도 있다. 정신세계와 문화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장소는 어디라도 볼프스엑이다.)

비정신 세계의 중심인 어머니가 죽었고 그 질서를 따르던 아버지와 형도 죽었다. 무라우는 어쩌면 이제 정신세계가 소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례식에서 무라우는 남은 자들 역시 위선자들임을 확인한다.

일찍이 무라우는 볼프스엑의 비정신적 상황을 견딜 수 없어 떠났지만 변한 것은 없다. 고향을 버린다고 고향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부모가 죽었다고 내 뿌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나 자신이 소멸해야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무라우는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을 이스라엘 종교단체에 희사한다.(이 역시 소멸행위로 볼 수 있다.) 그는 모든 관계를 소멸시키려고 한다. 부모의 장례식 후 1년 동안 '소멸'을 쓰고 마흔아홉에 생을 마감한다.

소설 '소멸'에서 프란츠 요셉 무라우가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모와 고향뿐만이 아니다. 그는 삼촌, 대주교와 여동생에서부터, 나치 장교, 농부, 음악, 사진, 로마, 조국 등 모든 것을 검증한다. 그는 결코 온정주의에 빠지는 법 없이 끝까지 세계를 부인한다. 그는 모든 것을 끝장내려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소멸극'을 완전한 '무'를 향한 행위 혹은 허무주의로 규정하면 곤란하다.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제국주의와 두 차례 세계대전이 대륙을 휩쓰는 동안 다른 작가들의 '문학적 망명'과 달리 조국 오스트리아의 현실에 맞선 사람이다.

물리적 '소멸'은 '사라짐'을 지향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다른 생명체의 죽음에 기대어 산다. 물론 그 또한 스스로 죽거나 죽음당한다. 현상만으로 볼 때 생명체는 궁극적으로 (상대를) 소멸시키고 (스스로) 소멸하고 (상대에게) 소멸당하는 과정 속에서 존재한다. 우리가 무엇을 먹는 행위는 타자에 대한 소멸행위이며 자신의 생명행위이다. 그래서 소멸은 '사라짐'이며 '생겨남'이다.

척추동물은 성행위를 통해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내고, 늙은 개체는 죽는다. 죽음은 한 개체의 입장에서 보면 소멸이지만, 종의 입장에 보면 '영원히 사는 방식'이다. 늙은 개체의 소멸과 새로운 개체의 탄생을 통해 종은 변화에 적응한다. 예컨대 갑자기 기후가 변하거나 가공할 전염병이 번질 경우 그 이전 환경에 맞게 발달한 낡은 개체는 적응할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개체 중 일부는 환경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한다. 환경변화에도 종의 생명이 이어지는 것이다.

죽음은 단위면적(공간) 안에 새로운 개체가 살아갈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유익하다. 늙은 개체가 소멸하지 않고 새로운 개체와 다툼을 벌인다면 새로운 개체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먼저 태어난 늙은 개체는 '기득권'을 바탕으로 새로운 개체를 억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엄청난 환경변화가 닥친다면 종 자체가 소멸할 수도 있다.

종의 입장에서 보면 개체의 소멸은 긍정적이고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소멸을 적대시하는 것은 부패과정이 흉하기 때문이며 우리 자신이 개체이기 때문이다. 종의 입장에서 개체의 소멸은 긍정적이지만, 개체가 자신의 소멸을 긍정적으로 간주한다면 곤란하다. 소멸을 원하는 자살이 이어질 것이고 이는 결국 종의 소멸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개체가 소멸을 적대시하는 것은 종의 생존에 필수적인 태도다.

죽은 개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성에 부합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생명의 순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른바 분해와 부패 그리고 흡수다. 이 과정이 살아있는 우리에게 흉하게 비친다.

사체의 분해에 개입하는 것은 파리, 딱정벌레, 개미와 같은 곤충과 진균 등이다. (파리는 대체로 자신이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을 낳기 위해 사체를 찾는다. 그러나 알에서 나온 구더기는 사체를 먹으며 자란다.) 이들 곤충은 크고 단단한 사체를 작고 부드러운 물질로 분해한다. 크기에 따라 분해에 가담하는 동물과 곤충이 다르고, 결국 사체는 다른 생명이 흡수하기 좋은 크기의 물질로 변해간다.

사체가 잘게 부서질수록, 원래의 형태나 형질을 덜 띨수록 흡수가 용이하다. 소멸과 부패는 보기에 흉하지만 생산과정인 셈이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소멸' 역시 '탄생'을 향한 '부패'로 읽어도 틀리지 않다. 아니, 그렇게 읽어야 한다. 모든 것을 끝장내려는 무라우의 태도는 모든 것을 잘게 부수는 곤충과 박테리아의 행위와 다르지 않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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