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개학과 함께 '선거 열풍'

입력 2008-09-02 06:00:00

▲ 2학기가 시작되면서 대구시내 초등학교들이 전교어린이회장 선거운동 열기로 뜨겁다. 28일 오전 수성구 청림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회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 선거운동원들이 홍보용 피켓을 들고 등굣길 학생들에게 한 표를 부탁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모습이 어른들 선거 못지않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 2학기가 시작되면서 대구시내 초등학교들이 전교어린이회장 선거운동 열기로 뜨겁다. 28일 오전 수성구 청림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회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 선거운동원들이 홍보용 피켓을 들고 등굣길 학생들에게 한 표를 부탁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모습이 어른들 선거 못지않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개학을 하면서 초등학교가 '선거 열풍'으로 뜨겁다. 2학기 전교어린이 회장단, 학급 회장단 등 학교 임원을 선출하기 때문이다. 요즘엔 과거처럼 교사에게 지명을 받거나 부모님의 '배경'을 등에 업고 선출되는 '체육관 임원'은 없다. 후보의 자격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원 선거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학교가 술렁인다.(중·고교는 학생회 임원 임기가 1년이어서 2학기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선거가 없다.)

◆학교와 가정은 선거 열풍

지난 8월 중순 대구 북구 S문화센터는 '초등학교 반장 선거 대비' 특강을 마련했다. 한 반에 7명씩 편성돼 2~4시간 동안 강사가 발표 잘하는 요령과 선거공약 만드는 방법에 대해 강의했다. 이 문화센터 직원은 "반편성을 할 때는 같은 학급은 물론 가능하면 같은 학교 학생이 함께 수업을 듣지 않도록 배려했다"며 "강사가 학생들에게 선거공약 원고를 만들어 주기도 하며, 일부 강사들은 초교 고학년이나 중·고교생을 상대로 개인 교습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처럼 신학기를 앞둔 방학 동안에는 백화점 및 대형소매점의 문화센터, 스피치학원 등이 앞다퉈 '반장 대비' 강좌를 마련하고 있다. 이들 강좌에선 학생들이 출마 동기나 공약을 적은 연설문을 만들어 다른 학생 앞에서 발표하는 연습을 하고, 억양이나 말투 등 말하기 기술도 익힌다. 문구점이나 인터넷 사이트 등에선 형형색색의 피켓을 만들어 주거나 연설문을 대신 작성해 주기도 한다.

'표심 얻기' 경쟁도 치열하다. 특히 발표회 등 각종 행사가 예정된 2학기에는 이들 행사를 주관하는 임원들의 역할이 크기 때문에 1학기보다 경쟁이 더 뜨겁다. 3~5일 동안의 선거 운동 기간을 둔 전교어린이회장단 선거는 물론 선거운동 기간 없이 불시에 치르는 학급 임원 선거까지 '기성세대의 선거판'을 방불케 하는 경우도 있다. 학원이나 아파트단지별로 삼삼오오 팀을 이뤄 특정 후보를 후원하거나 친한 친구들이 선거캠프의 참모가 돼 함께 연설문이나 선거 홍보물을 만들기도 한다. 후보나 선거운동원들이 초콜릿이나 과자, 인터넷 게임 머니를 주면서 지지를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 급우들에게 마술쇼 등 이벤트를 마련해 환심을 사려는 후보들도 있다고 한다. 수성구 A초교 4학년 담임교사는 "한 학급에서 10여명이 회장 선거에 출마할 정도로 후보가 난립해 10표 미만으로 당선되는 경우도 있다"며 "일부 학교는 학생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3개월 단위로 학급 임원을 선출하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 잦은 선거에 따른 부작용도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부모들도 자녀들의 선거에 뛰어들면서 열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초교 5학년 아들을 둔 이희경(40·대구시 달서구 상인동)씨는 "1학기 때 학급회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실패한 아들이 다시 도전하고 싶다고 해서 부부가 며칠 저녁 동안 선거 전략을 짜느라 고심하고 있다"며 "평소 알고 지내는 같은 반 아이들의 엄마들에게 전화를 걸어 지지를 요청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학교 임원, 소중한 경험

학교 임원 선거에 관심이 높아진 것은 '기회가 열려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에게 좋은 경험을 갖게 하거나 남들보다 뭐든지 앞서야 한다는 부모의 욕심도 작용하고 있다. 3학년 딸을 둔 김모(35·수성구 범물동)씨는 "2학년 때 우리 딸과 같은 반인 이웃집 아이가 '반장'을 했는데, 은근히 자존심이 상해 딸에게 출마를 권유했다"고 말했다. 부모의 지나친 욕심이 앞서선 안 되겠지만 어쨌든 어린 시절 학교 임원 경험은 자신감, 봉사정신, 책임감, 리더십을 길러주는 데 더없이 좋은 기회인 것은 분명하다. 박영배 운암초교 교장은 "학급이나 전교 회장이 되면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고 조정하며, 다른 학생들보다 모범이 돼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기 때문에 리더십을 키우는 좋은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청림초교 조성희 교사는 "그 학급의 회장이 누구냐에 따라 학급 분위기에 큰 차이가 난다"며 "학급 회장은 때론 담임을 대신하는 역할도 하고,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할 때가 많기 때문에 리더십이나 봉사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원의 경험은 중·고교로 갈수록 현실적인 이점으로 작용한다. 학교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임원을 하면 내신성적에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 또 민족사관고, 청심국제중, 외국어고 등에 지원할 경우 자기소개서를 쓰거나 구술면접을 할 때 임원 경험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대학진학 때도 다소 도움이 된다. 일부 대학들의 특별전형(리더십전형)에선 학교 임원 경험이 있는 학생에게만 지원자격을 주기도 한다.

후보가 아닌 다른 학생들도 선거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선물공세로 표를 사려는 후보들도 있지만 초등학생이라고 해서 호락호락 넘어가지만은 않는다. 공부를 잘하는 후보들이 호감을 얻는 편이지만 잘난 척하거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패배의 쓴맛을 보는 경우도 있다. 조성희 교사는 "아이들이 선물을 받거나 맛난 것을 사준다고 해서 찍어주지는 않고, 이보다는 성격이 좋고 공부를 잘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고학년, 중·고생에겐 인기 시들

초교 고학년이나 중·고생이 되면 학교 임원에 대한 인기가 다소 시들해진다. 학원 등 과외 수업으로 시간이 없다거나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초교 6학년 아들이 있는 학부모 최모(41)씨는 "자신감과 리더십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아들에게 '반장선거'에 나가보라고 권유했는데, 아들은 '반장 하면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며 "아이가 어린 나이에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초교 5, 6학년 학급의 경우 출마자가 2, 3명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중·고교로 올라갈수록 공부에 대한 부담 때문에 학교 임원을 꺼리는 경향이 많아 일부 학교에서는 담임교사가 지명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노변중 이태옥 교장은 "학생회 임원이 된다고 해서 공부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는데도 중학생쯤 되면 학급 회장을 잘 맡지 않으려고 한다"며 "남을 위한 봉사나 희생정신, 적극성이 부족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교영기자 kim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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