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매닐로우의'When October Goes'가 생각나는 것을 보니 벌써 마음은 가을로 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늦을 만, 가을 추. 세상의 고비를 수도 없이 겪고, 뒤늦게 찾아온 사랑이 낙엽처럼, 그것도 늦가을 바싹 마른 그 낙엽처럼 처연한 영화 '만추'가 생각나는 계절이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도 있지만 나는 1981년 김수용 감독의 영화가 더 좋다. 김혜자 때문이다. 김혜자는 신기(神氣)가 있는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미친 듯한 뜨거움과 지독한 열정이 엿보인다.
그것이 고스란히 녹아든 영화가 '만추'다. 살인죄로 복역 중인 여죄수 혜림(김혜자). 그녀가 사흘간의 특별 휴가를 얻어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어머니 산소를 찾기 위해 강릉행 열차를 탄다.
이미 그녀의 영혼은 말라 있다. 미련도 염원도 없고, 사랑도 여죄수에게는 지독한 사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열차에서 한 청년(정동환)을 만난다. 그는 범죄조직에 휘말려 쫓기고 있다. 여자 호송원(여운계)의 날카로운 감시 속에 둘은 눈빛을 주고받는다.
바늘 끝처럼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두 영혼의 정사. 불꽃같다는 표현이 제격이다. 뒤늦게 찾아온 사랑이 믿기지가 않는다. 살인을 저지르고, 가혹한 운명에 치를 떨고 있는 그녀에게 사랑이라니. 그래서 그 남자의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교도소 앞에서 헤어지면서 묻는다. "이름은? 이름이 뭐예요?"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영혼은 하나가 된다. 알지도 못하는 누가 이런저런 이유로 붙여주었을 이름 석자.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전부가 된다.
남은 2년간의 감옥 생활에서도 숱하게 불렀을 그 이름. 마침내 그 영혼을 만나는 날. 아침부터 기다리기 시작한다. 가을의 호숫가에는 낙엽이 땅을 덮고 있다. 찬 공기가 수면을 스치고, 메마른 가지가 허한 소리를 낸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만 그는 오지 않는다. 그 시간 그는 감옥에 갇혀있다. 그것을 알 길이 없는 그녀는 그 벤치를 떠날 수가 없다. 마침내 체념한 듯 일어선 그녀를 휘감는 것은 낙엽이다. 쏟아져 내리는 낙엽이 그녀의 발길을 잡는다. 뒤늦게 찾아온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은 그녀의 마음처럼 말이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또 한 편의 영화가 '종착역'이다. 1953년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흑백영화로 제니퍼 존스와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주연을 했다.
늦가을 이국에서 만난 청년과 미국 중년부인의 애틋한 사랑이 기차역에서 벌어진다. 제니퍼 존스의 가슴 저린 눈빛과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깊은 눈이 참 인상적인 영화다. 이뤄질 수 없기에 더욱 안타깝고, 헤어져야 하기에 더욱 애절한 영화다.
가을의 심상은 슬프다. 배리 매닐로우는 내 품안에 아직 따스하게 남아 있는 그녀의 체온을 떠나보내기 싫어, 내 청춘이 떠나는 것이 싫어, 아직 더할 사랑이 남아 있어 10월이 가는 것이 싫다고 했지만, 나는 슬퍼서 가을이 오는 것이 싫다.
김중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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