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英雄의 외출

입력 2008-08-27 11:08:44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몇 번이나 본 장면들이지만 그래도 또 보고 싶은 감동의 순간들이다.

베이징 올림픽 야구 일본과의 준결승전. 2대 2로 맞선 8회 말 1사 1루. 타석엔 4번 타자 이승엽. 그는 볼카운트 2-1에서 일본 투수 이와세의 낮은 직구를 걷어 올려 우측 담장 너머 일본 응원단에 꽂았다.

이전 타석까지 25타수 3안타. 4회 말 무사 2, 3루에서 유격수 앞 병살타까지 쳤던 그다. 국내에서 TV로 지켜보는 국민들조차 "승엽이를 빼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英雄(영웅)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어디 이승엽뿐인가. 역도에서 세계 신기록을 작성한 장미란, 수영에서 한국 스포츠의 미래를 보여준 마린보이 박태환….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들먹일 때마다 감동의 순간들이 되살아난다.

금메달만 장하냐, 비록 금메달을 놓쳤지만, 아니 메달권에는 턱없이 못 미쳤지만 땀과 눈물로 지난 세월 스스로를 담금질한 선수들의 17일간의 善戰(선전)은 온 국민에게 氣(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39세의 나이로 39번째 풀코스를 완주한 마라톤의 이봉주, '우생순'으로 유명세를 치른 여자 핸드볼 팀….

그들의 자랑스러운 凱旋(개선)에 국민들은 일손을 놓고 박수를 보냈다. 선수들은 서울시내 퍼레이드에서도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거기까지면 됐다. 서울광장 특별무대에서 연예인들과 함께 국민대축제에 참석한 올림픽 경기장의 영웅들은 이번에는 쇼 무대에서 또 한번 '끼'를 보여야 했다. 일부 선수들은 신명보다는 피로한 표정이 역력하다. 억지로 불러 앉혀놓고 장기자랑을 하고 환영대회를 가진 대한체육회의 처사가 영 마뜩잖다.

유도 금메달리스트 최민호는 26일 청와대 녹지원의 오찬에서 인사말을 더듬기도 했다. 너무 긴장해서였을까, 감격해서였을까. 숲에 있어야 할 호랑이가 성내로 쫓겨 나와 우리에 갇힌 모습으로 비쳐졌다면 지나친 飛躍(비약)일까.

그들은 본인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국민 영웅' 값으로 당분간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할 판이다. 그들에게 방송사들의 집요한 출연 섭외가 이미 성사됐거나 진행되고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이다.

그들을, 그들의 감동적 장면들을 세상살이가 재미없을 때마다 두고두고 하나씩 꺼내 즐길 수는 없을까.

이경우 논설위원 thel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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