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인간 배트맨
숱한 슈퍼 히어로가 있지만 그가 가장 인간적이다. 그는 외계에서 오거나 초능력을 얻지도 못했고, 돌연변이도 아니다. 그는 다른 인간과 똑같은 육질에 뼈를 가진 유기체다.
그에게 초능력이 있다면 자본이다. 악에 맞서기 위해 007에 버금가는 신무기로 대적하는데, 그 힘이 바로 고담시의 재벌 2세라는 것이다. '배트맨'은 미국식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히어로물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를 몸소 실천하며, '영웅놀이'를 하듯이 밤이면 밤마다 달빛을 가리며 악의 머리에 내려앉는 한 마리 박쥐다.
왜 하필 박쥐일까.
이것이 두 얼굴을 가진 배트맨의 매력이다. 낮에는 망나니 갑부, 밤에는 외로운 악의 사냥꾼이 되는 외형적 얼굴 외에 그의 내면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악에 희생된 아비를 잊지 못해 선의 편에 선 그의 내면은 검은 박쥐처럼 어둡다. 악을 말살하고픈 욕망과 함께, 그 또한 폭력의 제왕이란 고민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배트맨'의 새 시리즈'다크나이트'를 보면서 해방 후 남로당의 거두 이주하의 말이 떠오른다. "절대는 원자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상사에 절대란 없다."
그렇다면 절대악과 절대선도 없다는 얘긴데, 더 나아가면 영웅도 악당도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 아닌가.
'영웅으로 죽거나, 살아남아서 스스로 악당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거나.''다크나이트'가 추구하는 선과 악의 지독히 어두운 삼각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사다.
희대의 악당 조커의 등장은 '배트맨 비긴즈'의 엔딩에 예고됐다. 고담시의 청렴 경찰 고든(게리 올드먼)이 내민 트럼프 카드 한 장. 거기에는 광대모양의 조커가 그려져 있다.
입이 양 옆으로 찢어져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광대 분장의 조커(히스 레저). 그는 한 은행에 나타나 돈을 통째 쓸어간다. 거대 악당 팔코니가 사라진 고담시를 그가 장악한다. 브루스 웨인(크리스천 베일)은 러시아 발레단 무용수와 데이트에 여념이 없고, 옛 연인 레이첼(매기 질렌홀)은 검사로 활동하며, 차기 시장후보로 떠오르는 스타검사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와 열애중이다.
조커가 시민의 목숨을 담보로 배트맨의 정체를 밝히려고 하면서 배트맨은 위기에 봉착한다. 이제 모든 범죄조직을 움직이는 배후 인물로 떠오른 조커는 배트맨을 죽이고 고담시의 끝장을 보려고 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조커이다. '배트맨' 1편을 보면서 "잭 니콜슨 이상의 조커는 없다"고 단언한 것은 오판이었다. 히스 레저는 굵게 울리는 남저음 목청에 컬트적인 몸짓, 종잡을 수 없는 조커의 캐릭터를 새롭게 쓰고 있다. 혀를 내어 침을 핥는 표정연기는 입이 찢어진 조커를 완벽하게 분석한 때문이다.
선과 악의 삼각관계에서 또 하나의 각을 이루는 것이 하비 덴트다. 그는 비제도권의 배트맨과 달리 제도권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기사다. 배트맨이 어둠의 기사라면, 그는 백색의 기사다. 그러나 그는 동전의 앞뒷면으로 죽음을 결정짓는 악인으로 타락한다. 너무나 쉬운 타락, 그것 또한 선과 악이라는 경계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일 것이다.
결국 개인적 트라우마를 벗겨내지 못한 배트맨과 비이성과 비규칙성으로 선을 조롱하는 조커는 두 얼굴의 투 페이스, 선과 악의 이중성을 가진 이성동체이다. "너(배트맨)는 나를 완벽하게 만들어준다"는 조커의 말대로 둘의 동전의 양면성을 가지고, 하비 덴트는 그 중간의 '무장지대'와 같은 존재다.
152분에 이르는 러닝 타임 중 상당부분을 이 셋 인물의 서사구조에 할애한다. 각자의 상징성이 무너지면서 배트맨의 태생처럼 영화는 음울하게도 또 다른 혼돈으로 치닫는다. 많은 분량과 설명, 상징 등으로 인해 액션 블록버스터를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자칫 지루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크 나이트'는 세련된 촬영과 빠른 편집, 배트맨의 목소리처럼 묵직한 사운드, 도시를 누비는 배트 모빌과 모터사이클의 육중함이 스크린을 쥐고 흔든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볼만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영화 보는 내내 더 이상의 '히스 레저표 조커'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는 '다크 나이트' 촬영을 막 끝낸 지난 1월 22일, 자택에서 약물과다복용으로 인해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52분. 15세 관람가.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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