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동의 전시 찍어보기] 영과회와 향토회전

입력 2008-08-08 06:00:10

근대 초기 대구문화계의 단면

▲ 국립현대미술관 신소장품 순회전
▲ 국립현대미술관 신소장품 순회전

영과회와 향토회전 /~8.17 / 문화예술회관

3년 전 광복 60주년을 맞아 '대구문화사 60년전'을 준비할 때 일이었다. 대구 근대미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1920년대의 신문기사부터 찾기 시작했는데, 당시 전통서화 쪽의 소식은 일단 뒤로 미룬 채 우선 막 형성되기 시작했을 서양화단을 먼저 주목했었다. 그것은 제2회 'O科會'전 회원들이 남긴 기념사진 한 장 때문이었는데, 대구에서 결성된 근대적인 문화예술인들의 자주적이고 의식적인 단체의 모습을 시각적인 이미지로서 전해주는 현재로선 가장 초기의 기록일 것이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 개개의 면면들과 활동들을 당시 식민지적 시대상황과 함께 놓고 그 의미를 찾아보고 싶었는데, 대구문화예술회관이 '대구미술 다시보기'라는 연속 기획안에서 그 '영과회와 향토회전'을 조명하는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 전시회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이 대구 근대화단에는 이인성 외에도 특히 수채화에 발군의 실력을 보였던 여러 작가들이 있었다. 앞으로 대구미술의 외연은 연구에 따라 더 확대해갈 것이지만, 영과회 '사건'은 거기에 참여한 작가들의 활동 범위가 '향토'를 훨씬 뛰어넘어 당대 조선을 대표할만한 수준들이었다는 느낌을 준다. 조선 향토색론을 펼친 근원 김용준이 시가부에 (그리고 향토회 1, 2회전에 모두 출품하고 있다), 동요부에는 이원수, 윤석중, 방정환 같은 이름들도 함께 있어서 그 1928년 4월의 대구가 정말 궁금해진다.

1930년의 향토회 결성은 대구 서양화단의 성격이 결정되는 또 다른 역사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영과회가 해산된 후 새로 결성된 향토회는 이갑기, 이상춘 등이 빠지고 이후 대구미술의 특색을 나타낼 지역중심의 화단활동으로 국한된 면이 없지않다. 이를 대표하는 작가들인 박명조, 서동진, 이인성 배명학 등의 활동이 중심이 된다. 이상의 두 단체들의 연혁과 관련한 자료들을 소상하게 정리해서 보여주는 참여 학예사와 연구자들의 성실한 노력이 돋보이는 전시회이다.

영과회에서 핵심적인 활동가였으나, 해체 후 일본과 서울로 옮겨갔다는 짧은 소식만 남긴 대구상고를 다녔다는 이상춘의 흔적은 후에, "무대 장치가 이상춘군 서거"라는 조선일보의 부음 기사에서 다시 눈에 띈다. 당시 신문은 돈암동 자택에서 29세를 일기로 영면했다고 전하는데, 그간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카프사건으로 검거되어 수인 번호를 가슴에 단 채 찍은 얼굴 사진 한 장과 신문 연재소설의 삽화로 실린 판화 두 점이 전부인데, 사진 표정에 흐르는 옅은 미소는 그가 짧은 생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가를 말없이 전하는 듯하다. 그 무렵 대구에서, 조선에서 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때마침 그 옆 전시실에서 동시에 펼쳐지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작년 신소장품 순회전은 당시 대구 작가들의 작품 몇 점을 포함하고 있어서 행운이다. 특히 1980년대 민중미술계열의 최고 수준의 작품들이 대거 포함되어서 더욱 볼 만하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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