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 들어서 실용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실용과 관련 있는 용어가 실사구시(實事求是)이다. 실사구시는 청나라 때 고증학파가 내세운 학문 방법론을 뜻하는데, '실질적인 일에 나아가 옳음을 구한다', 또는 '사실에 의거해서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라는 정도로 해석된다.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서기 1세기 경인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漢書)'이다. '한서' 「하간헌왕 유덕(河間獻王 劉德) 열전」에서 유덕이 "학문을 닦고 옛것을 좋아하며 실질적인 일에 나아가 옳음을 구한다(修學好古,實事求是)"라고 평한 것이다. '한서'를 주석한 안사고(?師古:581∼645)는 실사구시에 대해 "힘써서 사실을 얻고 매번 진실로 옳음을 구하는 것이다(務得事實,每求?是也)"라고 해석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실사구시가 무조건 이익이 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옳음을 구하는 것'이란 점이다. 청대 고증학이 실사구시를 학문 방법론으로 유통시켰지만 진정한 실사구시는 아니었다고 비판받는 이유도 '옳음'을 추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여러 차례 실사구시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에서 "대체로 성현의 도는 몸소 실천하면서 공론(空論)을 숭상하지 않는 데에 있으니 진실한 것은 의당 강구하고 헛된 것은 의거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정희는 그러면서 청대 고증학이 의리를 뒤로 미루는 것에 반대하고 고증과 의리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대 고증학은 문자(文字)나 음운(音韻), 훈고(訓?) 등의 방법으로 옛 고전을 연구하고 정비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연구 결과는 현재 옛 고전을 연구할 때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것이 되었지만 문헌 고증에 치우친 나머지 사상적인 면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만주족이 지배하고 있는 청나라에서 사상적인 면, 즉 옳음을 추구하려면 현실 권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청대 고증학자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의리를 뒤로 미루어놓고, 문헌 고증에만 매달린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실질적인 일에 나아가는' 실사(實事)는 했지만 구시(求是), 즉 옳음을 구하지는 못했던 절름발이 학문이 되었던 것이다.
실사구시는 이처럼 '옳음'이란 가치판단이 들어가야 완전한 형체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맹자(孟子)'의 첫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맹자' 양혜왕(梁惠王) 장구(章句)는 양(梁)나라 혜왕(惠王)이 맹자를 보고 "선생께서 천 리나 되는 먼 길을 멀다고 여기지 않고서 찾아오셨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어떠한 이익이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맹자가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까?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답했다고 전한다. 맹자는 의(義)에 기반하지 않은 이(利)는 도리어 사회에 해로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정조는 '일득록(日得錄)'에서 "제왕가(帝王家)에서 어찌 문장을 추구하겠는가. 실질적인 공적(功績)과 실질적인 덕(德)에 힘쓸 뿐이다"라고 말했다. 당초 10년 예정으로 건축을 시작했던 수원 화성을 중간 6개월의 공백기간을 포함하고도 34개월 만에 완공할 수 있었던 것은 실질적인 공적에 힘썼기 때문이었다. 과거 백성들의 강제 부역에 의존하던 축성 방식을 임금 노동으로 바꾸면서 노동생산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진데다 거중기를 비롯한 각종 과학기술을 총동원한 실용정신의 승리였던 것이다. 정조는 '일득록'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라고 말했다. 왕가에서 부지런히 일하되 검소함을 추구하면 백성들이 살 찔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것이 정조가 추구한 '실질적인 덕', 즉 제왕의 의리였다. 청와대 수석들과 장차관들의 재산이 공개되면서 다시 강부자 내각, 강부자 비서진 논란이 거세다. 이들은 자신들의 부를 늘리는 데는 탁월한 실력이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일반 서민들의 부를 늘리는데도 그러할까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한 마디로 이(利)는 있으나 의(義)는 없는 절름발이 실용이 아닐 수 없다. '실사(實事)는 있으되 구시(求是)는 없는 그들만의 실용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든다. 공직은 선출직과 임명직을 막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나가야 하는 자리이다. 여기에서 의(義)는 공의(公義)를 뜻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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