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죽어야 하는 것은 동일한 것…
통영대교를 지나 산양면으로 들어갔다. 산양면은 미륵도의 다른 명칭이기도 하다. 한산도에 가기 전에 미륵도 달아공원에 들러 아름다운 한려수도를 바라보고 싶었다. 몇 굽이의 고갯길을 돌아 해변으로 내려섰다. 기대하지 않았던 만남, 아무리 비켜가려고 해도 스치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는 길은 존재하는 모양이다. 도로변에 만들어진 작은 표지판. '당포대첩지'. 차를 세웠다. 낚시를 하는 사람에게 물으니 지금은 삼덕항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하지만 통제사의 흔적이라곤 단지 표지판 하나가 전부였다. 쓸쓸했다.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 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 않고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에서, 세상은 뒤채이며 무너져 갔고, 죽어서 돌아서는 자들 앞에서 칼은 속수무책이었다.(김훈, '칼의 노래' 부분)
통제사가 연전연승을 이루던 시간과 관련된 이 장소에서조차 쓸쓸함을 느껴야 하는 내 마음의 움직임. 눈에 보이는 적에게 던지는 칼날은 예리하다. 하지만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헤쳐 나갈 수 없는 무형의 대상에게 칼은 속수무책이었다. 그건 통제사에게나 나에게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지닌 그릇의 크기를 담을 수 없다고 해서 임금에게 칼을 겨눌 수는 없는 일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고 해서 민초들에게 칼을 내리칠 수는 없는 일이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닷물에는 이름을 모르는 수많은 잡어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분명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삶 자체일 게다. 이념이고 사상이고 부정이고 부패고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게다. 그들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이 주는 본질적 일상의 안락함일 게다. 그 자체를 탓할 수만은 없을 게다.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삶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시 쓸쓸했다.
2차 출진의 첫 전투인 사천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함대는 1592년 6월 1일 함대를 이동하여 고성 사량도 뒷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여덟시 경 일본 군선이 당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함대를 이동하여 열시쯤 당포에 도착했다. 일본군 삼백여 명은 성내에서 노략질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반은 육지에서 조총으로 공격해 왔다. 일본 함대는 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었다. 이순신 함대는 거북선으로 아다케(일본의 가장 큰 배)를 들이받으면서 용두에서 현자총통을 쏘았고, 각각 천자, 지자 대장군전을 쏘아 배를 깨뜨렸다. 중위장 권준은 활로 일본 장수(가메이 코레노리)를 쏘아 맞혔고 군관들이 뛰어들어 머리를 베었다. 이에 일본 수군은 사기를 잃고 도망하여 왜선 21척은 모두 분멸되었다. 머릿속에는 드라마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방포하라'는 통제사의 목소리가 반복해서 울렸다.
거북선에 의한 협격전이 펼쳐졌던 당포. 거북선은 사천포해전에서 처음 실전 배치되었지만 사천포는 포구 앞바다의 수심이 얕아 거북선과 판옥선단이 협격전을 펼치기에는 제약이 따랐고, 그 과정에서 통제사가 어깨 부위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에 반해 당포는 수심이 깊고 포구 앞이 트여 있어 협격전을 펴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포구에 정박한 뱃전에 출렁이는 낮은 파도가 정겨웠다. 어디선가 봉화가 오르고 거북선 머리에서 현자총통이 터졌다. 이대로 승리의 함성 속에 머물고 싶었다. 앞으로 힘차게 걸어가지 못하고 여전히 거기에 머물고 싶은 생각 때문에 다시 쓸쓸했다. 물고기들은 여전히 거기에서 유영하고 있었다.
내 젊은 적들의 문장은 칼을 닮아 있었다. 이러한 적들 수만 명이 경상해안에 집결해 있었다. 내가 죽인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이 날려도 나는 이 바다 위에 남아 있어야 했다.(김훈, '칼의 노래' 부분)
죽은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이 날리는 적의 날카로운 칼날 사이로 통제사의 '물들일 염'자가 스며들었다. 죽이는 자와 죽어가는 자, 사실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거리가 없었다. 지금 죽어갈 뿐이지 어차피 죽어야 하는 것은 동일한 것 아닌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바다 위에 남아 있어야 했던 통제사, 그가 부르는 칼의 노래가 실로 허망했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댓글 많은 뉴스
홍준표 대선 출마하나 "트럼프 상대 할 사람 나밖에 없다"
나경원 "'계엄해제 표결 불참'은 민주당 지지자들 탓…국회 포위했다"
홍준표, 尹에게 朴처럼 된다 이미 경고…"대구시장 그만두고 돕겠다"
언론이 감춘 진실…수상한 헌재 Vs. 민주당 국헌문란 [석민의News픽]
"한동훈 사살" 제보 받았다던 김어준…결국 경찰 고발 당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