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우리 아이 큰일났어요. '고부간의 갈등' 할 때 '고부'가 무슨 뜻인지 몰라 엄마한테 묻습니다. 고부의 뜻도 모르는 주제에 영어 공부는 해서 뭣 합니까?" 고3 아들의 언어와 영어 공부에 관해 상담을 하면서 어느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한 말이다. 요즘 아이들 상당수가 '고부'(姑婦)가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뜻한다는 것을 모른다고 설명하며, 그 집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어서 우리말 어휘력이 좋으면 영어도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으며, 우리말을 잘해야 영어도 잘할 수 있다는 어머니의 말에 동의한다고 했다.
새 정부의 영어교육 실행 방향이 아직 구체적으로 확정된 것은 없지만 영어 사교육은 이미 과열되고 있다. 외국어는 일찍 배울수록 발음이 정확하며, 두개 언어 동시구사(bilingual)를 훨씬 쉽게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용적인 측면에서 의사소통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과 고급스럽고 품위 있게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 사이에는 질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생활 주변의 가벼운 주제를 두고 이야기할 때는 그렇게 말을 잘하지만 조금 무거운 주제로 넘어가면 횡설수설하는 사람이 있다. 말은 다소 어눌하고 느리지만 동서양의 고전을 적절하게 인용하고 고사성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사람도 있다. 교양의 깊이를 느낄 때 상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표정과 자세는 달라진다.
외국인과 대화할 때 발음과 억양 등에서 원어민과 비슷해지기란 매우 어렵다. 이 점은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상대방은 우리가 외국인이라는 전제하에서 대화를 한다. TV 오락프로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요란스럽게 말하지만 어휘 구사가 부정확하고 다소 천박하다는 느낌을 주는 외국인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주제를 두고 대화할 때 말은 느리고 발음은 별로 좋지 않지만 다산이나 연암 선생의 글을 인용하고 대표적인 우리 현대문학 작품을 언급하는 사람이 있다. 누구에게서 더 호감을 느끼겠는가. 우리가 외국인과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겉만 유창한 것보다는 신구약 성경이나 희랍신화, 셰익스피어 작품 등을 적절하게 언급할 수 있을 정도로 서양 고전이나 문화사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을 때 상대가 우리를 보는 눈은 달라질 것이다.
영어시험을 치고 나면 상당수의 학생들이 해석은 되는데 틀렸다며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십중팔구는 우리글에 대한 독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언어 영역 실력이 부족해서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국어를 잘 해야 최고 수준의 영문을 이해할 수 있다. 모국어 모범 문장을 꾸준하게 많이 읽는 사람만이 외국어를 제대로, 잘 습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차분하게 균형을 추구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윤일현 교육평론가·송원교육문화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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