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싶은 길]대구 중구 계산동 떡전골목

입력 2008-04-17 07:55:30

100년 역사 지닌 흑백의 거리엔 진풍경이 있다

나른한 볕을 맞으며 어슬렁거리고 싶은 봄이다. 이럴때면 너무 붐비는 동성로보다는 제법 한가로워 여유롭기까지 한 약전골목을 거닐고 싶어진다.

약전골목은 동성로와 불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그 느낌이 다르다. 사진으로 치면 총천연색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동성로와는 달리 오래된 흑백 장면인 약전골목은 천천히, 느리게 움직인다. 단조로운 느낌이지만 정이 더 가는 이유다.

약전골목은 특별한 볼일이 없이도 일부러 찾아갈 만큼 역사적 의미를 가진 곳이다. 대구 약령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약령시로 한국 기네스북에 기록됐으며, 그 역사는 350여년으로 추정된다. 1906년 대구성이 헐리면서 종로인근에서 열리던 약령시가 지금의 남성로로 옮겨왔으니, 그 역사만도 족히 100년은 된다.

약전골목을 걷다가 빠뜨리지 말고 염매시장 떡전골목을 거쳐야 한다. 지금 오랜 역사의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보지 않으면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풍경이 펼쳐지고 있으니, 카메라를 챙겨 길을 나서보는 것도 좋겠다.

현재 떡전골목은 앞으로 들어설 예정인 현대백화점 부지에 포함돼 철거작업이 한창이다. 염매시장 일대 떡집 37개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12개가 현대백화점 부지에 포함되면서 자리를 비우게 됐다. 떡전골목에는 여기저기 '철거'라는 붉은 글씨가 칠해져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염매시장 떡전골목은 6·25동란 이후 피란민들의 떡 행상과 떡 좌판에서 시작됐다.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요기꺼리를 판매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1960년대 떡전골목 도로에 좌판을 깔고 노점형식으로 떡전이 상설, 형성되기 시작했다.

떡전골목 입구 작은 골목에는 염매이유식, 동아이유식 등이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기업이 분유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전통잡곡을 활용해 이유식을 만들던 전통을 보여주는 곳으로, 오래된 뻥튀기기계도 구경할 수 있다. 이들 역시 조만간 근처로 자리를 옮긴다고 한다.

철거현장을 들여다보니 몇 일 전까지만 해도 그 모습을 지키고 있던 오래된 한옥이 이젠 떨어진 문짝, 시커먼 시멘트 덩어리로 수북하다. 저 집이 온기를 머물고 있던 시절,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흘러 넘쳤을까. 오래된 문을 열며 얼마나 기쁨과 슬픔, 사랑이 오갔을까 생각하니 버려진 문짝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이 골목에는 유독 시인과 소설가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몇 블록만 더 가면 상화고택이 나오지 않던가. 이 낡은 골목길을 돌아서며 한국 근현대 문학에서 숱한 시와 소설의 실마리들이 쏟아져 나왔을 테지.

떡전골목을 나와 성밖골목을 거닐어본다. 제탕·제환약집이 들어선 성밖골목은 부산과 경남의 유생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을 가려면 거쳐야 했던 영남대로. 100년 전만 해도 대구에서 가장 긴 골목이었다고 하니, 그 역사적 의미를 천천히 음미하며 걸어보는 것도 좋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 역시 공사로 소음도가니다.

약전골목에는 전국 최대 한약박물관인 약령시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1천여점의 유물과 약령시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바로 옆 약령테마공원은 작지만 각종 약초들이 심어져 있다. 벤치에서 잠시 쉬면서 한숨 돌리고 어떤 약초들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약전골목에 위치한 구 제일교회 예배당과 종탑건물은 대구시유형문화재 제30호로, 고풍스러운 고딕양식의 근대 건축물이다.

이처럼 약전골목과 염매시장을 꼼꼼히 다 둘러봐도 30분이면 족하다.

대구시내 한복판에 이처럼 역사적인 거리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 하지만 그 일부는 이미 옛 모습이 허물어지고 있다. 역사적인 모습이 더 사라지기 전에, 한번쯤 이 거리를 거닐어보는 것은 어떨까.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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