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군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로 북과 서는 낙동강과 남강이 흐르고, 남과 동은 600m가 넘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함안 읍내의 서쪽 언덕에 1천500년 전 사라진 안라국(아라가야)의 옛무덤들이 과거의 영화로움을 조용히 간직하며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안라국은 함안 일대에 둥지를 튼 나라로 흔히 가야 연맹의 하나였던 아라가야(阿羅伽倻)로 통한다. 하지만 아라가야는 신라 중기 이후에 생겨난 명칭이며 안라국이 정확한 이름이다.
고분의 대부분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여덟 갈래의 능선 위에 분포하고 있다. 안라국의 왕을 비롯한 최고 지배층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100여 기의 대형 고분들은 높은 곳에 열을 지어 위치하고, 그 아래로 1천여 기의 중소형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행정구역이 약간 어긋나는 관계로 군청 뒤쪽의 4기는 '말산리 고분군'으로, 그 외에는 모두 '도항리 고분군'으로 분류하였다.
고분군은 1917년 일본 사람들이 처음으로 발굴 조사를 한 이후, 상당수 무덤들이 소리소문 없이 도굴을 당했으며 1992~1994년 창원문화재연구소가 3차례에 걸쳐 발굴을 하여 수레바퀴토기와 새모양토기 등의 각종 토기류, 철로 만든 무기와 갑옷, 말에게 입히던 여러 장식물, 그리고 안라국 사람의 뼈가 출토됐다.
무덤의 내부 구조는 덧널무덤(목곽묘)이 주류를 이루며 일부는 구덩이식 돌방무덤(竪穴式)을 취하고 있는데, 덧널무덤들은 대체로 4~5세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수혈식의 하나인 34호분은 이 곳에서 가장 큰 무덤으로 직경 40m, 높이 10m에 이르러 하나의 조그만 언덕이다.
안라국의 군주를 비롯해 지배층들이 고이 잠들어 있는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은 둘러보는데 2시간 정도 걸리는 꽤 넓은 고분군이다. 저 무덤들을 만들기 위해 강제 동원돼 땀과 피를 바친 안라국의 수많은 백성들, 그리고 죽어서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소망했던 망족(望族)들의 부질없는 행동, 인생이란 죽으면 그만인 것을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큰 무덤을 만들었던 것일까. 다 썩어 문드러진 그들의 육신을 위한 공간치고는 너무 넓은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부질없는 행동은 전설 속으로만 남을 뻔했던 안라국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이 곳에서 나온 수백점의 유물(함안박물관 소장)은 1천500년 전 그들의 존재를 약간이나마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무덤들 사이로 조성된 산길에 가까운 산책로에는 산책을 즐기는 주민들이 종종 눈에 띈다. 안라국 시절에는 일반 백성들은 함부로 접근도 못했을 지배층의 무덤들이 이젠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산책 코스로 탈바꿈한 것이다. 물론 무덤이다 보니 어둑어둑한 시간에는 좀 무서울 것이다. 무덤 봉분에 올라가 천하를 바라보니 함안(가야) 읍내가 두 눈에 훤히 내려다보이고 성산(城山)을 비롯한 주변 산들이 내 눈 높이에서 나를 바라본다.
안라국의 높다란 무덤의 언덕들을 넘으면 서쪽 자락으로 함안 고을의 오랜 내력과 민속, 문화를 담고 있는 작지만 수려한 외모의 군립 함안박물관이 나온다. 1층에는 함안 지역 고분에서 나온 안라국 시절 유물들이 조명의 후광을 받으며 당당히 관람객들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으며, 2층에도 앞층과 마찬가지로 안라국 유물들이 주류를 이루지만 좀 더 세심히 이를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박물관 부근 성산성에서 출토된 목간 160점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목간(木簡) 중에서 가장 양이 많으면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문헌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대사연구에 중요한 열쇠로 가치있다. 그 외에 안라국 특유의 토기인 불꽃무늬토기와 그 시절 철기 문화 수준을 짐작하게 해 주는 말갑옷, 기타 여러 갑옷 등이 볼거리이며, 7세기 이후 함안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전시실도 있어 함안 고을의 역사와 문화를 한 곳에 담은 훌륭한 문화적 공간이다.
김상훈(영남삶터탐구연구회·청구중 교사)
참고자료:삶터탐구활동 길잡이(대구남부교육청)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에 대한 Q&A
▷안라국은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청동기시대, 함안 지역에 둥지를 튼 세력들이 주변의 여러 세력을 통합해 기원전 3세기경, 조그만 나라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안라국의 전신인 안야국(安倻國)이다. 3세기 초반 포상팔국 전쟁에서 승리하여 가야 연맹의 주세력으로 우뚝 서면서 안라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백제와 신라의 틈바구니에서 561년 신라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멸망의 비운을 맞는다. 영역은 함안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의령, 동으로 마산, 서로는 진주, 남으로는 마산의 진동과 오서에 이르렀으며 진동에 안라국의 무역항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진동 앞바다를 통해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오사카와 나라 지역 등 여러 지역을 개척하여 통치했으며, 그들의 선진문화를 아낌없이 전해주었으니 불꽃무늬토기가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도항리·말산리 고분군과 함께 가야고분들의 입지 조건에서 볼 수 있는 특징?
가야 고분의 입지는 고구려나 신라 고분들의 입지랑 비교해 볼 때 매우 특이히다. 이들은 대개의 경우 능선의 정상부나 사면, 혹은 독립 구릉 위에 이루어져 있는데, 그 주위에는 거의 예외없이 하천과 평야가 펼쳐져 있다. 가야 고분이 이러한 곳에 있는 이유는 태양을 숭배하던 당시의 집단적인 신앙 의식으로 파악되기도 하고, 명계에 가까운 높은 곳에 안장하려는 계세사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 수로를 통하여 문물교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물길에 대한 우호적인 사회의식의 표출로 보여지기도 하고 물을 신성시하였기 때문으로 보이기도 한다. 대형 고분의 주위에는 거의 예외없이 산성 등의 성곽이 축조되어 있는데,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의 둘레 산에는 성산산성, 봉산산성을 비롯해 크고 작은 많은 산성이 축조돼 자리잡고 있다(고령 지산동 고분군 경우 주산성, 망산산성). 이는 세력권이나 생활권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에 이런 곳도 있어요!
▷입곡군립공원
함안군 산인면에는 뱀이 기어가듯, 구불구불 흐르는 입곡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상류에는 자연생태 그대로 보존된 '입곡군립공원'이 형성돼 주민들과 관광객에게 자연관광지와 쉼터의 역할을 제공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협곡을 가로막은 입곡저수지는 폭 4km에 저수지 양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한다. 저수지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에 우거진 송림이, 오른쪽으로는 완만한 경사지에 활엽수림과 침엽수림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저수지를 중심으로 협곡을 이루고 있는 이곳에는 수려한 자연 풍광과 함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형형색색의 바위, 기암절벽이 그대로 보존돼 신비로움을 더한다.
▷방어산 마애불(보물 제159호)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방어산 9부 능선 암면을 깎아 새긴 마애약사불상과 협시보살상은 신라 애장왕 2년(801년)에 조성하여 잘 알려진 마애불이다. 이 불상은 8세기의 이상적 사실주의 경향의 불상들과는 다소 다른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거구의 불상이지만, 위장부적(偉丈夫的)인 체구가 아닌 현실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특징은 정적이며 양감이 있는 포근한 얼굴, 곡선미가 넘치는 각부, 동글고 밋밋한 어깨, 가슴과 배 등에서도 부드러움이 엿보이고 있다. 오랜 세월 풍화로 인해 마모되는가 하면 기도객들의 촛불에서 발생한 그을음이 암벽을 그을려 잘 보이지 않아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고려동 유적지(경남 도기념물 제56호)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장내마을은 고려 말 성균관 진사 이오가 고려가 망하자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담장을 쌓고 살았던 곳이다. 이오는 끝까지 고려의 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은거지 주위에 담을 쌓고 담 밖은 새 왕조의 땅이라 해도, 담안은 고려 유민의 거주지라는 것을 명시하는 고려동학이라는 비석을 세워놓았다. 그는 담장 안에서 우물을 파고 전답을 개간하며 자급자족을 하였다. 현재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비, 고려동 담장, 고려종택, 자미단, 자미정, 율간정, 복정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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