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보다 1만배 빠른 '그리드'시대 눈앞

입력 2008-04-15 07:00:00

지구상 모든 컴퓨터 네트워크화 자료 공유…선점땐 부가가치 막대 각국 개발

'인터넷의 진화인가, 인터넷의 종말인가'

영국 텔레그래프 신문은 최근 월드와이드웹(www)보다 1만배나 빠른 속도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그리드(grid) 컴퓨팅 네트워크가 현실화하면서 전통적 형태의 인터넷은 조만간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리드 컴퓨팅은 지리적으로 분산된 서버, 고성능 컴퓨터, 대용량 저장장치, 데이터베이스, 첨단 실험장비, 인력 자원 등 가용한 모든 자원들을 고속 네트워크에 연결해 상호 공유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디지털 신경망 구조의 차세대 인터넷 서비스.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CERN)는 오는 여름 가동에 들어갈 세계 최대 핵 입자가속기인 강입자 충돌기(LHC)에서 발생하는 방대한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 그리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두개의 입자빔을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충돌시켜 빅뱅 직후의 상황을 재현하는 실험 결과는 개별 컴퓨터가 처리하기엔 용량이 지나치게 방대했으나 그리드 컴퓨팅을 이용할 경우 아무리 큰 용량이라도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다는 것.

수도꼭지만 틀면 쏟아지는 물처럼, 콘센트만 꽂으면 흐르는 전기처럼, 단일 인증 한번으로 전 세계 컴퓨터를 하나로 묶어주는 시대가 머지않은 것이다.

◆그리드 시대의 도래

그리드는 첨단 네트워크 기술과 고성능 컴퓨터 기술의 결합을 통해 연구에 필요한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인프라다. 이상호 한국IBM 실장은 "그리드 컴퓨팅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세계 각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치료 백신, 게임 등 고성능 컴퓨팅 환경이 요구되는 거의 모든 산업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스위스의 제약회사 노바티스는 신약 개발에 필요한 수백억원의 슈퍼컴퓨터를 구입하지 않고 회사 보유 PC 2천700여대를 그리드로 연결시켜 사용했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약 4억원에 불과했다.

외계 생명체 존재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 지난 1999년 미국 UC버클리 대학이 시작한 SETI(Search for Extra Terrestrial Intelligence)의 '@Home 프로젝트'에는 400만대 이상의 PC가 참여하고 있다.

이 밖에 미국 항공우주국(NASA), 과학재단(NSF) 등도 각각 그리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 일본은 문부과학성 주도로 4개의 그리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우리 나라는 지난 2002년부터 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을 중심으로 '국가 그리드 기반 구축' 사업을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그리드 기술이 실제 시장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할 날이 머지않았다. 인터넷 관련 업체들은 연구·개발 수준에서 벗어나 이를 실제 산업 현장에 접목하기 시작했다. 미국·일본·유럽 등 선진국에 비해 다소 늦었지만 자체 기술로 잇따라 시범 사이트가 나오면서 국내에서도 조만간 '비즈니스 그리드 시대'가 성큼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이 기술이 일반화될 경우 영화나 음악 등 대용량 정보도 불과 수초 만에 내려받을 수 있고 컴퓨터가 느려지거나 멈추는 '화면정지' 현상도 사라진다. 또 수십만명이 동시에 접속하는 실시간 온라인 게임과 일반전화 요금 수준의 고화질 영상통화도 가능하다.

◆업계와 시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한 음악 사이트는 그리드 기술 적용 후 네트워크 비용을 최대 75%, 서버 비용을 50% 이상 줄였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시장을 관망하던 다국적 컴퓨팅 업체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이미 주요 포털 사이트는 그리드 기술을 시범 적용하고 있다. 멜론뿐 아니라 웬만한 음악·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는 그리드 기술을 적용한 상용화 모델을 선보이고 있다. 그리드 기술이 앞선 외국에서는 JP모건이 주식 거래와 위험 관리를 위한 컴퓨팅 연산을 위해 수천개의 CPU(중앙처리장치)를 연결하는 '컴퓨터 백본'이라는 그리드 프로젝트를 추진했으며, IBM과 게임 제공 업체 버터플라이는 온라인 비디오 게임 시장을 위한 주문형 상용 그리드인 '버터플라이 그리드'를 선보였다. 석유 탐사와 제약 개발, 생물학 분야에도 그리드 기술이 빠르게 탑재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미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솔루션을 개발한 데 이어 KT·삼성SDS 등 굵직한 업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2008년이 비즈니스 그리드의 원년이 되고 있는 셈.

한국IBM 관계자는 "그리드 비즈니스에서 성공하기 위해 3년 이상 투자해 왔다"며 "올해에는 열매를 거둘 수 있는 프로젝트가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디지털 빅브라더' 관건

지난해 2월 아마존 S3 서비스가 일시 중단된 적이 있었다. 아마존 측은 수많은 사용자가 인증을 요청해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명했지만 그리드 컴퓨팅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리드 컴퓨팅은 모든 정보가 중앙에 집중되기 때문에 정보가 유출될 경우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정보의 집적으로 초래될 '디지털 빅브라더'가 어떤 형태로든 악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리드 컴퓨팅의 정착 시기는 '보안' 문제 해결에 달려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 연동된 수많은 시스템과 사이트들의 다양한 장애요인을 사전에 감지하고 통제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관리 능력과 안정적인 서비스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우리 나라는 컴퓨팅 기술은 다소 뒤져 있지만, 네트워크가 튼튼해 그리드 기술 발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 또 그리드 기술을 좀 더 빨리 진척시키기 위해 국가 그리드 기술 표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이춘수기자 zapper@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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