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 묘비명과 바보뽑기

입력 2008-04-12 07:25:19

1991년 국내에 '골빈 사나이'(Far Out Man)라는 엽기스런 미국 코미디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오래 전의 영화인지라 줄거리며 출연배우 등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강렬한 '포스' 넘쳐나던 홍보 문구만은 아직도 선합니다. '노 브레인 노 페인(No brain no pain)! 뇌가 없으면 고통도 없다. 좌충우돌 대책 없는 골빈 사나이. 뇌 없는 사람이 보아야 이해가 빠른 영화'.

뇌수종 환자 중에는 극소수이긴 해도 뇌가 줄어드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뇌 조직이 중심부터 없어져 마치 야자수 열매처럼 뻥 뚫린 공간에 물이 차고, 바깥쪽 뇌 조직만 남는다는군요. 놀라운 것은 그런 환자 중에는 지적 능력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임상 사례가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뇌의 특정 부위가 사라지더라도 다른 부위의 뇌 조직이 그 기능을 대신 수행해 낸다고 하는군요. 실로 놀라운 인체의 적응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나'라는 정체성을 갖고 삽니다. '나'라는 생각 즉 '자아의식'은 뇌가 만들어낸 것이지요. 자아의식을 발생하는 뇌 부위는 전두엽(앞이마쪽 뇌)입니다. 인류에게 자아의식은 생존에 필요한 진화적 선택이었고 숙명 같은 굴레일 겁니다. 그런데 자아의식이 없는 이가 있습니다. 붓다와 같은 깨달은 이가 그렇습니다. 성자들은 '자아는 환상에 불과하다'며 굴레에서 벗어난 대자유를 설파합니다.

이번 18대 총선에서는 성자가 아니면서도 자아가 없어 보이는 정치인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적지 않은 정치인들이 낡은 계파정치와 지역감정에 다시 기댔습니다. 누구하고 친하니까 뽑아달라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양심이 있으면 출마를 하지 못할 비리 전력 정치인도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그들의 눈엔 공약이나 정책 등 정치적 정체성보다 여의도만 보였을 겁니다. 그들의 '정치적 자아'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극도로 높아져 헌정 이래 최저 투표율(46%)이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보탰습니다. 이번 선거의 진짜 패자는 한국의 대의 민주주의일 겁니다. 공정보도라는 명분 아래 전가의 보도인 양 양비론을 양산해, 정치적 혐오감을 부추긴 언론에도 그 책임이 있습니다. 이 난을 빌려 반성하고자 합니다.

전설적인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그룹 킹크림슨(King Crimson)은 1969년 발표한 'Epitaph'(묘비명)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규칙을 정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지식은 한낱 죽음으로 인도하는 벗일 뿐/ 내가 아는 한, 모든 인류의 운명은 바보들의 손에 달려 있지.'

인류 문명에 대한 묵시록적인 경고를 담은 이 노래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정치판이 더 이상 바보 뽑기 게임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는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까요.

김해용 기획취재부장 kimh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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