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이곳!]청도, 왜 이지경까지

입력 2008-01-31 16:13:08

'이정도 쯤이야'가 청도를 나락으로

"그놈의 선거가 두 사람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5만 원~10만 원을 받은 게 이렇게까지 큰 죄가 될 줄을 정말 몰랐습니다. 이제 아무도 선거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이죠. 다음 선거가 더 걱정입니다. 이 난리통을 치렀는데 누가 선거 운동을 하겠어요. 벌써 투표도 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경북 청도가 울고 있다. 재선거 때 지지를 부탁하며, 금품을 뿌린 혐의로 정한태 군수가 구속되면서 그 파장이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다. 우리나라 선거 역사상 처음으로 금품수수 의혹을 받던 선거 운동원 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청도가 전국 뉴스의 핵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선거와 관련, 정 군수 외에 지금까지 구속된 사람들만 22명에 이르고, 나머지 60여 명도 불구속 입건 상태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청도 군수직을 둘러싼 선거 비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민선 1∼3대를 지낸 김상순 전 군수가 2002년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거액의 공천 헌금을 국회의원에 건넨 사실이 적발돼 처음으로 낙마한 뒤 재선거로 당선된 이원동 전 군수도 업무추진비를 잘못 써 군수직에서 물러났다.

도대체 청도에서는 왜 이런 일들이 끊이지 않는 걸까. 농촌에 뿌리 박힌 돈 선거 병폐뿐만 아니라 전통 씨족문화와 초고령화 사회 도래가 과열 선거경쟁과 복합적으로 맞물린 결과다.

◆뿌리 깊은 돈 선거 병폐 때문에…

"각종 감투를 둘러싼 선거 때마다 돈이 오갑니다. 1, 2년 전이 아니라 10년도 넘은 얘기입니다. 어떤 감투는 1인당 10만 원까지 돈을 뿌리죠. 감투만 쓰면 뿌린 돈은 금방 회수할 수 있다는 손익 계산 때문입니다." 28일 청도읍에서 만난 한 40대 농민은 "농촌 사회의 돈 선거 병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뿌리 박힌 관행"이라며 "청도만의, 군수 선거 때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고 했다. 세월이 지날수록 물가 인상률에 맞춰 액수도 조금씩 올라가고 선거 때마다 비슷한 돈이 뿌려진다는 것. 이 농민은 "지난 3년간 매년 한, 두 차례의 선거마다 돈이 뿌려진 것 같다."며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도덕적 해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화양읍에서 만난 한 50대 농민은 "이번 재선거에서도 정한태 군수에 초점이 맞춰졌을 뿐 다른 후보들은 모두 깨끗하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선거 초창기 때부터 "10억 원을 써야 당선된다더라, 아니 20억 원은 돼야 한다더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실제 그랬다는 것. 이 농민은 "하루라도 빨리 수사가 끝나길 바라는 마음에 다른 후보들에 대한 조사를 굳이 요구하지 않는 것"이라며 "경찰이 정말 제대로 조사한다면 그 뿌리가 끝이 없을 것"이라고 자조했다.

공무원들조차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올 것이 왔을 뿐입니다. 돈을 뿌리치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너도 받고 나도 받는 분위기가 농촌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그 정도는 으레 받아야 하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다 농촌 특유의 '정' 때문이죠. 끝까지 뿌리치면 오히려 실례라는 겁니다." 한 면 단위 공무원은 "청도는 물론 우리나라 농촌 사회가 별반 다르지 않다."며 "경찰 수사가 청도에 한정됐을 뿐 우리보다 더 심각한 곳도 많다."도 했다. 청도 농민들과 공무원들은 "이런 문화를 그냥 두고 청도 한 곳만 다그쳐선 곤란하다."며 "정부와 경찰이 근본부터 바꾸지 않는 한 제2,3의 청도 사태가 언제든 다시 벌어질 수 있다."고 강한 불만을 터뜨렸다.

◆전통 씨족 문화 때문에…

청도군수 재선거가 유례없는 돈 선거로 흐른 또 다른 배경에는 농촌 사회의 전통 씨족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민선 출범 이후 지금까지 청도 군수는 씨족 사회에 기반을 둔 인사가 계속 당선됐고, 이 같은 씨족문화에 부담을 느낀 이번 재선거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금품을 뿌렸다는 분석이다.

"청도는 김·박·이씨 순으로 집성촌이 많고, 종친회 친목 모임이 유난히 발달한 곳으로, 전통 씨족문화가 민선 1기부터 충돌했습니다. 김해 김씨의 김상순 전 군수와 밀양 박씨의 양대 후보가 박빙의 대결을 벌이다 불과 1천 500여 표차에 불과한 아슬아슬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30년간 청도에서만 공직생활을 했다는 한 공무원은 "한쪽의 일방적 독주가 예상된 선거라도 씨족문화가 작용해 근소한 차이로 좁혀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청도"라며 "청도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150여 개의 재실이 있고, 나이 지긋한 청도 어른들은 기왕이면 같은 씨족에 투표를 하려는 성향이 강하다."고 했다.

김상순 전 군수가 거액의 공천헌금을 건네다 물러난 뒤 새로 부임한 이원동 전 군수도 씨족사회에 기반하기는 마찬가지.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한 가운데서도 고성 이씨의 강한 결집력이 결정적 계기가 돼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얘기가 많다. "반면 정한태 군수는 청도 용암온천을 비롯한 막대한 재력을 갖추긴 했지만 씨족 기반은 없었죠. 때문에 재력을 동원한 선거 사조직이 판을 쳤고, 결국 금품이 오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청도읍에서 만난 한 60대 주민도 "전통 씨족문화에 대한 부담이 돈선거로 번졌다는 소문이 더러 들린다."며 " 한나랑 공천 없이 무소속 후보 3명이 각축을 벌였던 터라 돈 선거 유혹이 더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초고령화 사회가 도래하면서…

"선거 운동원 조사 과정에서 '나이'에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50대 운동원 못지않게 60,70대가 많았기 때문이죠. 도시의 선거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초고령화 사회를 맞은 농촌에서는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금품수수를 수사했던 경찰 관계자는 "초고령화 또한 돈 선거를 낳은 직접적 원인"이라며 "사조직의 말단부터 최상위까지 어르신들이 꼭 끼어 있었다."고 했다. 결국 옛날 선거문화에 젖은 노인들이 "이 정도 쯤이야" 하는 생각에 아무 생각없이 돈을 주고 받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

경북도에 따르면 2007년 말 기준으로 청도의 고령화율(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32% 수준까지 치솟았다. 군위에 이어 경북 23개 시·도 가운데 다섯 번째로 높은 수치. 안 그래도 씨족문화가 발달한 곳에 초고령화까지 겹쳐 "네가 받으면 나도 받고 니가 찍으면 나도 찍는다."는 집단화 경향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 이번 재선거에서 돈을 주고 받은 청도의 60, 70대 노인들은 '과태료 50배'의 선거법 내용은 전혀 모른채 학연·지연·혈연에 얽혀 무작정 운동원으로 활동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경찰 관계자들은 "1인당 5만~10만 원의 현금은 적다면 적은 돈이지만 가난한 노인들에겐 한 달 생계비에 맞먹는 큰 돈"이라며 "순박한 노인들은 돈을 받은 후보에게 실제 투표하기 때문에 금품 수수 대상 1순위로 뽑혔을 것"이라고 했다.

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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