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긴 연휴, 명절이라고 유난 떨 필요 있나요?"
회사원 박중권(40) 씨는 올 설 연휴를 '무덤덤하지만 알차게' 보낼 계획이다. 세상이 달라지고 명절 풍속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가족은 소중하고 명절은 명절이니까. 본가와 처가가 모두 대구에 있기 때문에 설날 하루 바쁘게 움직여서 세배를 끝내고 나머지 휴일은 온전히 가족들과 휴식을 취한다는 목표. 예전 같으면 설 전날 부모님 댁을 찾아가 음식도 차리고, 설날 부모님과 함께 시골에 있는 큰집으로 달려갔지만 올해는 생략하기로 했다.
"고향에 계시던 큰아버지도 돌아가시도, 아버지 역시 연세가 많으셔서 이리저리 다니는 것을 힘들어 하십니다. 집이 가깝다보니 손주들도 자주 보시기 때문에 굳이 명절이라고 유난을 떨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가족들과 연휴를 맞아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올까 생각했지만 예약이 꽉 찼다는 말에 영화관에 갔다가 외식 한 번 하는 것으로 끝내기로 했다.
노총각인 이모(35) 씨는 고향인 상주에 가지 않을 계획이다. 연휴 전 주말에 부모님을 찾아뵙고 선물과 용돈도 두둑히 드린 뒤에 정작 연휴에는 친구들과 스키장에 가기로 했다. 친척들을 만나봐야 "장가 가라"는 말 밖에는 달리 나눌 이야기도 없다며 오히려 휴가 삼아 마음 껏 놀다올 생각이라고. "결혼 연령이 점차 늦어지면서 또래 친구들 중에도 아직 미혼이 많습니다. 어차피 명절 때마다 스트레스 받는 것보다는 재충전하는 기회로 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스키장 콘도는 작년 연말에 일찌감치 예약을 해 두었죠."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도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어른들은 나름대로 명절이 예전만 못하다고 푸념하고, 아이들은 세뱃돈 받는 재미를 빼면 굳이 그 먼 곳까지 나들이 가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투정이다. 설 준비한다고 미리 장을 보거나 가래떡과 강정을 준비하는 것도 차례를 모셔야 하는 집에서나 벌어지는 풍경일 뿐. 최모(42) 씨는 "명절이면 부모님이 계시는 큰 형을 찾아 서울로 가지만 사실 딱히 만나서 할 이야기도 없고, 예전처럼 일년에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닌데 새삼 반가울 것도 없다."고 했다.
차례상을 물리고 나면 벌어지는 풍경은 거의 대부분 집들마다 대동소이하다. 세뱃돈을 두둑히 챙긴 어린 조카들은 끼리끼리 컴퓨터 앞에 모여 게임을 한다고 정신없고, 제법 머리가 굵은 조카들은 건너방을 차지하고 드러누워 텔레비전 보기에 여념이 없다. 남자들끼리는 차례음식을 내놓고 음복한다며 술잔을 돌리지만 밍숭맹숭 이야기는 겉돌 뿐이고, 여자들은 한 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서 친정 집에서 갈 생각에 쌓여있는 설겆이거리가 얄미울 뿐이다. 그렇게 점심 무렵이 지나면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퇴직 공무원인 정모(64) 씨는 "명절이 명절답다는 것은 단지 가족들이 모이고, 선물을 주고받기 때문이 아니라 평소에 잊고 지냈던 끈끈한 정을 한 번 되새기는 자리이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런 의미는 퇴색해버리고 그저 형식적으로 만나거나 아예 자기만을 위한 시간으로 보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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