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권래불사권(權來不似權)

입력 2008-01-25 09:35:45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 한 달 남았다. 하지만 대통령직인수위가 있는 청와대 인근 삼청동 분위기를 보면 이미 정권은 바뀌었다. 삼청동 식당에는 점심·저녁 할 것 없이 인수위 인사들이 가득하다. 한나라당 관계자들도 많다. 일이 넘치는 인수위 인사들이 먼 곳에 식사를 하러 갈 수 없고, 만나자는 사람은 줄을 지어 삼청동에서 약속하다 보니 인기 식당은 예약조차 힘들 지경이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같은 고향인 대구·경북 사람들이 삼청동에서 느끼는 정권 교체감 지수는 더욱 높다. 24일 대구 동구의 유승민·주성영 의원과 이종화 북구청장, 이재만 동구청장이 인수위를 찾았다. 이 당선인의 공약인 K2 이전에 대한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얼마 전 시도지사협의회 참석차 서울을 찾았던 김범일 대구시장과 김관용 경북지사도 인수위를 찾아 지인들을 격려한 뒤 협의회에 참석했다. 우동기 영남대 총장 등 지역 유력 인사들도 심심찮게 인수위를 찾는다. 지난 15년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현상이다. 인수위에 들렀던 한 지역 인사는 "아는 사람이 많아 편하더라."며 "정말 정권이 바뀌긴 바뀐 모양"이라고 즐거워했다.

대구·경북이 고대하던 고향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니 지난 15년간 추락하고 쪼그라든 대구·경북의 경제가 이젠 나아지고 발전할까? 경부대운하가 추진돼 992㏊(300만 평)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고, 대운하건설본부 나아가 대운하관리청이 대구에 들어서고, K2가 이전하고, 대구 지하철 빚이 탕감되고, 동해안 에너지클러스터 조성이 탄력을 받으면 분명 대구·경북은 달라질 게다.

그러나 과거 대구·경북 정권 시절과 진배없는 대구·경북 사람들, 특히 지역 원로와 지역 리더들의 모습을 보면 걱정부터 앞선다.

한 인수위원은 곧 중요한 회의에 들어가야 하는 시간에 전화를 받았다. 인수위 앞에 와 있으니 마중나와 줄 수 없느냐는 지역 어른의 전화였다.

또 다른 인수위원은 동해안 에너지클러스터 조성을 구체화하기 위해 경북도에 전문가를 1명 파견해달라고 전화했다가 "공문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당황했다. 요직이 아니어도 좋으니 인수위에 자리 하나만 만들어 달라는 정부 기관과 여러 지자체의 로비를 받고 있는 터여서 경북도의 반응은 더더욱 생경했다.

인수위 주변에서 듣기 거북한 얘기도 많이 들린다. "인수위원이 되더니 전화도 안 받고 목이 뻣뻣해졌다더라.", "후진에게 길을 터줘야 할 잘 먹고 잘산 원로 인사가 어떤 어떤 자리를 원한다더라." 따위의 얘기들이다.

선배가 자기 자리에만 관심을 둬 후배를 아껴 키우지 않고, 출세한 인사가 자기 삶의 풍족함만 갈구하며 대구·경북의 내일에 대해 고민하지 않던 15년 전, 30년 전과 똑같다.

權不十年 花無十日紅(권불십년 화무십일홍). 대구·경북에 15년의 추운 겨울이 있었기에 앞으로 5년은 금쪽같이 아껴 써야 한다. 장·차관, 청와대 수석, 국회의원보다 실·국장과 과장 등 실무 자리가 더 중요하니 선배들이 능력 있는 후배를 발굴해 일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대운하가 실현 불가능하니 마니 卓上空論(탁상공론) 할 것이 아니라 낙동강에 배가 다니는 그날의 대구·경북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인수위가 7개 광역경제권으로 나누며 대구·경북권에 기존의 전자·섬유에다 '에너지'를 추가한 배경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워 대구·경북이 준비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窮究(궁구)해야 한다. 남들 다하는 연구개발(R&D) 특구, 경제자유구역도 좋지만 대구·경북에 경쟁력 있는 '교육 특구', '모발 센터'를 만들 방안은 없는지 밤을 지새워 상상해야 한다. 대운하관리청을 두고 대구와 경북이 싸울 게 아니라 혹여 낙동강 끝 자락에 있는 부산에 뺏길 염려는 없는지 세심하게 짚어야 한다. 과학기술이 전략산업이 된 충청권이 거대 가속기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에서 포항의 방사광가속기와 경주의 양성자가속기의 미래를 고심해야 한다. 千辛萬苦(천신만고) 끝에 유치한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체육 대회'로 끝내지 않으려는 연구도 해야 한다.

5년은 강산이 절반 바뀔 정도로 긴 시간이기도 하나 엉뚱한 욕심만 부리다가 눈 깜짝할 새 지나가버릴 수도 있다. 지역과 서울에 있는 대구·경북 사람들이 지혜롭지 못하면 權來不似權(권래불사권), 권력을 잡았다고 하나 대구·경북 지역은 5년 뒤에도 여전히 살기 어렵고 닫힌 '시골'로 남을 수 있다는 절박감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

최재왕 서울정치부장 jw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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