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 별똥별을 기다리며

입력 2008-01-19 08:57:31

새해다. 많은 연하 인사가 오고 간다. 서로의 소원성취를 빌어주고 동시에 자신도 한 해의 소망을 가슴에 품으면서 더 밝고 새로운 한 해를 기원한다. 누구에게나 소원 한 가지쯤은 있을 것이다. 소망을 가슴 속에 품은 사람의 삶은 진지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소망한다는 것은 꿈을 꾼다는 것이고 겸허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기에.

어릴 적, 나는 별똥별에 소원을 빌면 반드시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어머니와 언니들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추석이나 설이 가까워 올 때쯤이면 예쁜 새 옷을 입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기 위해 별똥별을 기다렸던 추억이 있다.

내 어릴 적 고향집 밤하늘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장엄한 황혼이 한낮의 무더위를 안고 서산을 넘어가면 솔숲에서는 서늘한 저녁바람이 어스름을 몰고 왔다. 집집마다 굴뚝에는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동네 엄마들의 아이 부르는 소리가 동구 밖에 메아리치면 시끄럽던 골목은 어느새 한산해진다. 어둠이 짙어오고 집집마다 나지막한 불이 밝혀지면 시골마을의 고요한 밤이 시작된다.

저녁을 먹고 사랑마루로 나오면 바깥은 이미 칠흑 어둠이다. 언니들을 따라 축대를 발로 더듬어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밤하늘의 별들이 찬란한 보석이 되어 마당 가득 쏟아져 내린다. 낮은 곳에서 우는 가느다란 풀벌레 소리가 한층 가까이 들리는 고요한 사방. 가로등도 없고 차도 흔치 않던 시절의 그런 밤은 온전한 사유의 시간이었다.

겨울 밤하늘의 별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초롱초롱한 별빛이 한기보다 차갑게 지붕에 내려앉고 지붕의 푸른 기왓골에 별빛이 자작자작 튀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한밤중에 소변이 마려워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마당에 나서기라도 할 때면 마당 가득히 내려앉은 별빛의 찬란함에 잠이 확 달아나곤 하였다. 온 세상이 모두 잠든 밤에도 별들이 그렇듯 반짝이며 밤을 지키는 것이 경이로웠다.

세월이 흘러 사회에 발을 내딛고부터는 별똥별이니 소원이니 하는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그러나 불혹을 넘어 艾年(애년)에 이른 지금, 별똥별이 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그 말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별똥별이 스치는 그 짧은 순간에 소원을 빌려면 항상 그 염원을 가슴 속에 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한순간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 꼭 이루고 말겠다는 오매불망 잊을 수 없는 간절한 염원. 그런 것이라야 순식간에 떨어지는 유성의 꼬리에 소원을 매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간절한 소원을 품은 사람이 다른 곳에 시간을 낭비할 수 있을까?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형편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노력을 게을리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다. 그러니 그 소원이 어찌 이루어지지 않으랴. 대기 중의 하나의 단순한 현상인 유성, 별똥별과 소원의 관계는 아마도 문자 저 너머에 담긴 의미, 비과학적인 것에 담긴 초과학의 이치가 아닐까 싶다.

천문학은 겸손과 인격수양의 학문이라고 한다. 밤하늘에 가득한 별을 보면 수억 광년을 달려온 조그만 빛이 비로소 오늘의 나에게 이르렀다는 그 신비한 우주의 경이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별들 중의 하나인 지구, 그 지구 안의 조그만 존재, 광활한 우주 속에 던져진 '나'라는 실체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 밤하늘이요 별이다. 그러기에 동서고금의 수많은 시인들이 별을 노래하지 않았던가.

밤하늘 한번 올려다보는 여유도 잃은 채 바삐 살아가고 있는 지금, 한겨울 밤 마당에서 내복바람으로 별을 올려다보던 그때로부터 어느새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러나 귀밑머리가 '약쑥처럼 희어지는' 쉰 살의 새해에 아득한 그때를 떠올리며 조그마한 소망 하나 가져본다.

축복처럼 지는 별똥별에 저마다 고운 소원 하나씩 매달기를, 사람들의 가슴마다 밤하늘의 별빛을 담아내는 작은 창 하나씩 가지기를…. 오늘밤 나도 별 하나를 그리며 가루약같이 깨끗한 소망 하나 가만히 품어 보리라.

서숙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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