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땅 가야산] (23)허물어져가는 가야산성

입력 2007-12-10 10:16:17

험한 절벽 따라 쌓아올린 '호국의 숨결'

장안에 화제를 몰고 온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1636년 겨울 병자호란 당시 청의 대군을 피해 인조가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47일간 머물며 겪었던 일들을 다루고 있다. "문자화된 역사를 살아 있는 생생한 살과 피의 형상으로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은 이 소설에는 전쟁이란 극한 상황에 처한 다양한 인간 군상(群像)들이 등장, 흥미를 더한다.

뜬금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남한산성'을 언급한 이유는 가야산에 있는 가야산성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남한산성이나 가야산성에서 보듯 우리 조상들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 산성(山城)을 쌓았다. 조선 세종 때의 양성지(梁誠之)는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라고 할 정도였다. 그 당시 민초들의 땀과 눈물로 쌓은 산성에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간과해서는 안될 이야기들이 성벽의 돌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이다.

가야산성이 언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일설에는 대가야(大伽倻)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가야의 수도였던 경북 고령과 가야산성의 거리는 약 14km. 이런 연유 등으로 대가야 전성기에 가야산성을 쌓았다는 추측이 나오고, 대가야가 이궁(離宮·임금이 거동할 때 머무는 별궁)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야산을 오르다 보면 곳곳에서 가야산성을 만날 수 있다.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를 출발, 용기골을 따라 서성재로 오르는 등산로를 가다 보면 백운2교가 나온다. 백운2교 부근이 가야산성의 남문터(南門祉)다. 남문지는 그 규모나 위치로 볼 때 가야산성의 주 출입구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10여m를 가면 남문지의 오른쪽 육축부(陸築部)에 해당되는 성벽이 있다. 용기골과 접한 남문지의 남동쪽 성벽은 유실돼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높이가 5m가량 되는 이 성벽은 13m정도 이어지다 산의 절벽과 맞닿아 있다. 크고 작은 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린 성벽에 손을 대면 성을 만든 이들의 숨결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가야산성은 산 정상인 칠불봉(1433m)의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용기골의 좌우로 상아덤과 재골산(才骨山)의 능선을 따라 축성됐다. 계곡을 품고 쌓은 전형적인 포곡식(包谷式) 산성. 2000년 대구대박물관이 가야산성에 대한 지표조사를 한 결과 성의 둘레는 7.156km이지만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진 상태다. 그나마 남아 있는 성벽은 높이가 1.5~3m 정도다. 성안 면적은 205만㎡.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만나는 가야산성의 한 부분은 서성재에서 칠불봉에 오르는 구간에 있다. 이곳은 무너진 성벽을 따라 등산객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일부 남아 있는 성벽의 형태를 보면 직경 50cm 내외의 산석(山石)을 이용해 성을 쌓았다. 일부는 자연암반 위에 쌓은 경우도 있고, 일부는 아랫부분까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져 있다. 허물어져 있는 성벽의 폭이 10m에 이르는 곳도 보인다. 서봉래 전 가야산국립공원 백운분소장은 "그 당시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녹아든 가야산성을 밟고 오르도록 등산로가 만들어져 매우 안타깝다."며 "산성 옆으로 새로운 등산로를 만들어 산성을 보호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대가야 무렵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산성은 옛 기록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축의 둘레가 4,828m, 높이는 1.5m인데 반은 퇴락하였다. 성내에는 계곡이, 10개 샘이 있으며 매우 험하다."고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 때엔 인근 백성들의 피신 장소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1594년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은 가야산성에 스님 의병장이 있음을 알게 됐고, 그후 조정에서는 승장(僧將) 신열(信悅)에게 명해 옛 성을 다시 고쳐 쌓게 하고 주민들이 병란을 피하게 했다는 것이다. 성안에 있던 절인 용기사 터에는 당시 사람들이 썼던 맷돌 등이 남아 있다. 가야산성이 호국 산성의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대부분이 허물어진 가야산성은 지금 시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먼저 지표조사를 했던 대구대박물관의 견해를 살펴보면 그 해답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 박물관 측은 무너진 성벽의 복원을 촉구했다. 남아있는 구간의 성벽을 참조하면 충분히 복원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문루 등의 복원과 함께 문이 있던 터 등에 대한 발굴조사도 뒤따라야 한다고도 했다. 성안에 있던 절들인 용기사, 백운암, 일요암 등의 터에 대한 발굴조사와 더불어 산을 찾은 사람들의 휴식처로 활용하는 방안도 제안하고 있다.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하루하루 스러져가는 가야산성! 가야산과 함께 민초들의 삶을 생생하게 지켜봤을 가야산성이 나라사랑을 되새겨보는 소중한 곳으로 탈바꿈하기를 기대해본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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