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세상] 얼리 어댑터 vs 슬로 어댑터

입력 2007-09-04 07:01:57

"새기술 모르모트 기꺼이" - "단순 편리한게 최고"

세상에는 유달리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있다. 새 기술에 열광하고 새것을 받아들이는 마니아적 감수성으로 가득 찬 그들. 신기술·신개념이 탑재된 새 제품이 나오면 밤잠을 설치고 지갑을 기꺼이 연다. 우리는 이들을 얼리 어댑터(Earlyadopter)라 부른다.

반면 첨단 기능도 좋지만 기계를 쓰자고 사용법을 공부하는 것이 마뜩하지 않은 이들도 있다. 모름지기 신제품의 미덕이란 찰나의 몰입을 즐기고 거기에서 쉬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다. 단순함과 편리성을 추구하는 슬로 어댑터(Slowadopter). 그들이 새로운 소비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새 제품 나오면 잠 못 이룬다-얼리 어댑터

신제품은 시장의 검증을 비켜갈 수 없다. 그러나 얼리 어댑터는 시장 검증이 있기 전의 '모르모트'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얼리 어댑터들은 비록 소수이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그 영향력은 날로 커지고 있다. 블로그와 커뮤니티에 둥지를 튼 그들의 사용기와 리뷰는 소비자들의 구매 행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찬진 드림위즈 사장은 널리 알려진 얼리 어댑터다. 그는 한때 PDA를 13대나 보유했을 정도로 첨단제품 동향에 관심이 많다.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http://blog.dreamwiz.com/chanjin)는 애플사의 아이폰 등 첨단 신제품 사용기가 가득하고 방문자들이 줄을 잇는다.

2005년 초 국내에서는 이른바 '보라돌이' 사건이 있었다. 일본의 한 가전 메이커가 출시한 디지털 카메라로 일정 조건 아래 사진을 찍으면 사물 간의 경계 부위가 보라색으로 나온다며 초기 구입자들이 항의하고 나선 사건이다. 제조업체 측은 제품 결함이 없다고 버텼지만 얼리 어답터들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등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결국 제조업체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 사건 말고도 적잖은 가전 메이커들은 얼리 어댑터들의 날카로운 눈에 걸려 리콜 및 제품 수정에 들어간 바 있다.

2006년 월드컵 때 국내 지상파 방송사들은 MMS(멀티모드서비스) TV시험방송을 했다. MMS는 한 채널의 디지털 전파 대역에 추가 채널을 몇 개 끼워 넣는 방식의 송출 서비스. 기술 발달로 인해 MMS를 하더라도 화질에 열화가 없다고 방송사들은 주장했지만, 오디오비디오 동호회 사이트에서 활동하고 있는 얼리 어댑터들은 전문가 뺨치는 지식을 앞세워 방송사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방송사들의 MMS 도입 시도는 결국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얼리 어댑터들이 활약하는 커뮤니티와 인터넷 카페들은 그 수를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전문 커뮤니티들은 소비자로부터 높은 신뢰를 받는다. 상품을 사기 전에 얼리 어댑터들의 사용기를 찾는 소비자들이 많다. 'DVD프라임'(http://dvdprime.paran.com), '에이브이코리아'(http://www.avkorea.co.kr), '루리웹'(http://ruliweb.empas.com), 디씨인사이드(http://www.dcinside.com), 'SLR클럽'(http://www.slrclub.com) 등 커뮤니티에는 제품 사용기와 정보 등을 주고받는 이들의 접속이 끊이지 않는다.

포털사이트 드림위즈는 전문 커뮤니티들을 모아 '매니안닷컴'(www.manian.com)이라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 사이트에서 매년 실시하는 '디지털 어워드'는 대형 메이커들도 비상한 관심을 가질 정도다. '얼리 어댑터'(www.earlyadopter.co.kr)라는 사이트도 있다. 제품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리뷰를 통해 기업과 소비자 간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정보를 축적한다는 취지로 운영되고 있다.

◆게으른 소비를 예찬한다-슬로 어댑터

2004년 소니와 닌텐도는 비슷한 시기에 휴대용 게임기 PSP와 닌텐도DS를 각각 출시했다. 업계에서는 더 높은 성능과 첨단기능을 지닌 PSP의 승리를 점쳤다. 그러나 결과는 '싸고 쉽게 조작하는' 게임기를 표방한 DS의 압승이었다.

차세대 게임기 시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소니는 각각 엑스박스360과 PS3를 출시했다. 엑스박스360과 PS3는 HDTV를 지원하는 등 첨단기능으로 무장했지만, 닌텐도가 출시한 복병 'Wii'에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Wii'는 엑스박스360과 PS3에 크게 못미치는 기기적 성능을 갖췄지만, 기발한 입력 컨트롤러와 게임성을 무기로 소비자들의 감성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블로그 세계에서도 초미니 블로그가 인기를 끌고 있다. '미투데이'(http://me2day.net) '플레이톡'(http://playtalk.net)과 같은 초미니 블로그는 단 한 줄의 문장으로 표현된 즉흥적 감수성을 다수와 공유한다.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꾸미는 데 필요한 근면성을 초미니 블로그는 요구하지 않는다.

국내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는 지난 2년 간 500만 건이 다운로드된 롱런 베스트 셀러가 등장했다. 스타크래프트나 리니지 같은 근사하고 전문적인 게임이 아니라, 버튼 하나만 조작하면 되는 원 버튼 방식의 단순한 게임이다. 이 밖에도 모바일 게임 내려받기 순위에서 상위에 오른 것들은 지극히 단순하고 반복적이며 가벼운 게임들 일색이다.

대중 소비자들은 신기술의 화려함보다 실용성과 편리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현상들을 나열하며 LG경제연구원은 "지나치게 복잡한 기능을 피하며, 단순하고 짧은 시간 동안 즐길 수 있는 IT 기기를 찾는 슬로 어댑터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최근 냈다.

슬로 어댑터의 정체성에 대해 LG경제연구원은 ▷새로운 형태의 즐거움이나 네트워킹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대중 소비자들보다 적극적이고 ▷얼리 어댑터보다는 대중적인 취향을 가지고 새로운 경험과 서비스에 서서히 관심을 갖는 소비자군으로 파악했다.

슬로 어댑터는 가족이나 친구 등 제한된 네트워크 반경 안에서 구매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에 얼리 어댑터에 비해 소비 확산 속도가 완만하지만 훨씬 더 지속력이 있다고 LG경제연구원은 보았다. LG경제연구원 손민선 연구원은 "쉽고 간단하고 짧은 시간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야말로 '게으른 생활인'을 유혹하는 핵심코드"라고 지적했다.

김해용기자 kimhy@msnet.co.kr

♠ 키워드-얼리 어댑터(Earlyadopter)

제품이 출시될 때 가장 먼저 구입해 평가를 내린 뒤 주위에 정보를 알려주는 성향을 가진 소비자군을 일컫는 말. 얼리(early)와 어댑터(adopter)의 합성어로 미국의 사회학자 에버릿 로저스가 1957년 저서 '디퓨전 오브 이노베이션'(Diffusion of Innovation)에서 처음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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