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정의 독서일기] 마당 깊은 집/ 김원일

입력 2007-08-30 17:07:53

전쟁은 인간의 세상을 단번에 '하향평준화' 시킨다. 사회를 지탱하게 하는 도덕이나 법, 가치와 미덕 같은 질서 원리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명제 앞에 가차없이 무너진다. 인간적 삶의 원리는 본능적 생존 원리로 대체된다. 어쩔 수 없다. 무차별 살육전이 펼쳐지는 지옥 속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이 집중되게 마련이다.

불행히도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는 그런 전쟁을 겪었다. 짐승의 세월을 지나왔다. 수많은 목숨들이 영문도 모르고 총에 맞고 탱크에 깔리고 폭격을 맞았다. 굶어죽고 아파 죽고 한 맺혀 죽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퍼뜨린지도 모를 어줍잖은 이념의 알약을 주워 먹고 형제가 갈라지고 이웃이 원수 되고 피로 물든 땅덩이가 생솔가지 찢기듯 찢어졌다.

그리고, 불안한 평화가 왔다. 짐승이 할퀴고 간 상처와 혈흔 위에서 사람들은 다시 사람의 삶을 살기 위해 아우성쳤다. 예측불허의 삶은 질척한 웅덩이처럼 도처에 펼쳐져 있었다. 이 책은 그 시절의 이야기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 장터거리 주막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던 13살 시골 소년은 누나를 따라 어머니가 있는 대구의 '마당 깊은 집'으로 온다. 그 집에는 안채의 주인 식구와 아래채에 세든 피난민 네 가족이 살고 있다. 전쟁 '덕분'에 방적공장의 특수를 누리며 더 잘 살게 되는 '주인집'이 있는가하면 전쟁 '때문'에 상이군인이 되어 삶이 막막해진 옆방의 '준호 아버지'가 있다. 또한 난리통에 가족과 헤어져 고향을 등지고 피난 온 '경기댁'과 '평양댁'이 있다. 그들은 미군부대에 가서 돈을 벌어오거나 행상을 하거나 양키시장에서 헌 군복을 팔며 근근히 살아간다. 소년의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한다. 그야말로 어머니는 "애새끼 넷을 믹이고 공부시킬라고 뼈마디가 내려앉도록 새벽부터 자정까지" 기생들 옷을 만드느라 재봉틀을 돌린다. 아버지는 국군 서울 수복직전 단신으로 월북해버렸다.

어머니는 유독 맏이인 소년에게 엄하고 냉정하다. 그래서 소년은 자신이 어머니가 낳은 친자식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신문을 떼다 팔던 소년은 '신문팔이에서 신문배달원'으로 승격을 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배가 고프다. 모성에 대한 허기증은 소년을 더 힘들게 한다. 어머니와의 갈등은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 날 기어이 그를 가출케 한다. 그 날 주인집의 성대한 파티를 몰래 구경하던 소년에게 어머니는 무섭게 화를 내는데, 그 길로 소년은 집을 뛰쳐나온다.

포연이 가시지 않은 폐허 위에 다시 집을 세우고 밥을 끓이며 아이들을 키우던 사람들. 그렇지만 저마다 가슴들은 채 식지 않은 화인(火印)으로 뜨겁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 뜨거움에 데이기도 한다. 소년에 대한 어머니의 가혹함은 놀란 가슴 저절로 터져 나오는 생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다름 아닐 것이다. 홀로 월북해버린 남편에 대한 분노와 슬픔도 묻어있을 터였다. 소년도 그것을 알고 있다. 집을 나와 역 대합실에서 지내고 있던 소년은 결국 어머니를 따라 집으로 들어와 따뜻한 고깃국을 먹으며 '나는 역시 어머니의 아들'임을 깨닫고 목이 메인다.

아이든 어른이든 '짐승의 세월'을 통과한 이들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대견하고 눈물겹다.

bipasor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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