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를 찾아서] 천도교 성지 ④-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입력 2007-08-09 07:25:20

독자 여러분은 3·1운동 하면 누가 생각나십니까?

정확한 설문조사를 해본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사람의 절대다수가 유관순을 떠올린다. 코흘리개에서부터, 연세 드신 분들까지 우리나라 삼일운동의 상징 아이콘은 '유관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유관순은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진 정의의 여신으로 당연히 숭앙받을 만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3·1운동의 핵심인물로 유관순이 너무(?) 강조되는 면이 없지 않아서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할 때가 있다. 재조명되어야 할 독립운동가는 여럿 계시지만, 그 가운데에는 천도교 제3대 교조 의암 손병희 선생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의암은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에 이은 천도교 제3대 교조로서 신앙인의 길과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완전히 일치시킨 위대한 인물이다. 천도교 성지를 담기 위해 서울 지역을 취재하다 보니, 독립운동의 현장과 천도교 성지가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서울 도심에서 만날 수 있는 천도교 성지는 올해로 건립 85년째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 기미년 3·1독립선언서 배부터, 삼일만세운동이 울려퍼진 탑동공원, 종로구 수운회관 앞 세계어린이운동발상비, 3·1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보성사 기념비(서울 조계사 뒤쪽), 명월관 분관인 태화관에서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이종일 동상,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 터, 해월 최시형 참수터, 한때 천도교가 운영하였던 고려대학교 내 기념물과 의암흉상, 몰려드는 천도교인들로 인하여 형성되기 시작한 인사동 일대를 들 수 있다. 외곽으로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명전사들을 수련시킨 강북구 우이동 봉황각, 종로구 경운동에서 옮겨온 우이동 옛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현 종학대학원), 그렇게도 원하던 독립을 미처 보지 못하고 숨진 의암이 묻혀있는 우이동 산소, 명월관 기생 산월에서 의암을 만나 그 미망인이 되었고 그 자신 또한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초창기를 이끈 주옥경 여사의 묘소(우이동)까지 만날 수 있다.

◈ 봉황각을 아시나요

재평가받아야 될 천도교 성지 가운데 대표적인 두 현장은 서울 강북구 우이동 봉황각과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이다. 우이동 봉황각은 경술국치 이후 의암이 독립항쟁을 위해 젊은 천도교인들을 육체적으로 훈련시키고 정신적으로 단련시킨 현장이다. '조직의 귀재' 손병희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지금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되는 게 아니다. 독립정신을 심어주고, 훈련시켜야한다."면서 거사를 준비할 공간을 마련하였다. 바로 우이동 봉황각이다. 봉황이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그날, 너희들이 빼앗아간 대한민국의 독립이 성취될 것이라는 비원을 담은 당호가 가슴에 와닿는다. 봉황각(서울시 향토문화재 제2호)은 우이동 버스 종점에서 도선사 입구쪽으로 가다가 좌측으로 천도교 종학대학원 건물 뒤에 자리 잡고 있다. 솔내를 피우며 나그네에게 그늘을 선사하는 숲속길을 기분좋게 올라가면, 역사의 현장이다. 현장에 들어서면 봉황각보다 먼저 구(舊)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이 먼저 오랜 연륜, 편안한 미소를 방문객을 맞는다. 기자가 방문했던 날, 종학대학원에서는 한창 수련 중인 천도교 여신도들의 글 읽는 소리가 여름 하늘로 퍼져가고 있었다. 수련하는 어머니를 따라온 개구쟁이 자녀들은 우이동 넓고 맑은 자연을 닮았다. 한울을 모시고, 하나같이 때가 묻지 않은 맑은 얼굴이다.

◈ 의암의 혼이 스며

종학대학원 건물(중앙총부 별관)을 통과하니 봉황각 날렵한 지붕선이 기자를 맞는다. "어서 오시게!" 봉황각에 스며있는 의암의 불사불멸한 혼이 양손을 내밀며 반기는 바로 그곳이다. 경술국치 이후 '10년 뒤 광복'을 가슴깊이 새긴 의암은 이곳에서 장차 독립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할 전국의 고위 교역자들을 숨어서 수련시켰다. 483명을 7회로 나눠, 한번에 49일씩 수련시켰다. 수련하면서 의암은 '이신환성'(以身煥性)을 강조하였다. 즉 육체적인 훈련을 시키면서, 육신은 일시적이요 성령은 영원하니, 유형인 육신을 무형의 성령으로 바꾸라는 '이신환성'은 곧 죽음을 각오하라는 주문이었다. 목숨 걸고 독립운동에 뛰어들라는 절대명령을 천도교 교역자들은 익혀나갔다. 일곱 차례에 걸쳐서, 49일씩 수련받은 483명은 우이동에서 배우고 나가, 전국 방방곡곡으로 벌어진 삼일만세운동의 전위대가 되었다. 천도교가 3·1운동에서 전국 조직망을 가동하여 일제히 궐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정신적 원동력을 키워나간 덕분이다. 교역자들을 수련시키면서 의암은 눈길을 다른 데로 끌기 위해 위장전술을 폈다. 때로는 임금의 위엄도 무색할 만큼 화려한 쌍두마차를 타고 다녔고, 때로는 기생을 불러 야유회도 가졌다. 세간에서는 의암의 호방한 생활에 대해 '맛이 갔다'고 손가락질하였다.

◈ "내가 손가락질 받아야 "

개의치 않았다. 그런 혹평을 자초한 의암의 의도대로 일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아무리 '의도된 탕아'역이었지만, 때로는 비감한 기분도 들었다. 일부러 마신 술로 대취한 의암은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우이동 봉황각을 찾아와 피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다짐하였다. "오늘 비록 내가 취했다고, 의암이 죽은 양 여기지 말라. 언젠가 너희들도 그보다 더한 눈물을 흘릴 날 있으리니…."

의암이 봉황각 기둥을 부여잡고 흘리는 뜨거운 눈물의 의미를 하늘도 알고 땅도 알았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력을 훈련시키고, 한편으로는 논 팔고 소 팔아서 등사기를 사들였다. 삼일운동에서 갑자기 그렇게 많은 독립선언서들이 배포된 것은 의암의 철저한 준비가 받쳐준 덕분이었다. 봉황각 부지는 3만 평에 달하였고, 천도교 13자 주문처럼 봉황각 외에도 12채의 건물이 더 있었으나 삼일운동이 터진 이후 일제가 다 철거하고 말았다. 이곳에서 시작된 봉황각 삼일운동은 2004년부터 재현되고 있다.

◈ 중앙대교당과 독립자금

봉황각이 천도교 교역자들의 독립운동 수련공간이었다면,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천도교의 총본산 교당으로 주요 종교의식과 시일(侍日)식과 기념식 등을 행하는 곳이다. 서울 명동성당, 조선총독부 건물과 함께 1920년대 서울의 3대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역사를 지닌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일제강점기 모든 민족집회와 해방 후 귀국한 해외독립지사들의 귀국인사, 강연회, 정치집회가 열린 유서깊은 현장이기도 하다.

의암의 셋째사위인 소파 방정환은 이곳에서 어린이 운동을 시작하기도 하였고, 주변에는 독립선언서 배부터, 우리나라 첫 종합잡지이던 개벽사 터,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등으로 짜여 있어 격랑의 근현대사를 지켜온 핵심 공간이다. 서울시는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하였다.

경술 국치 이후 '10년 안에 독립한다'고 다짐하였던 의암은 점차 그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독립운동을 성공시키려면, 거사를 이끌 인적 자원도 있어야하지만, 거사를 뒷받침할 자금도 있어야한다. 두 가지가 엇비슷하게 충족되지 않으면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의암은 분명히 그런 맘이었을 것이다.

◈ 천도교 없었다면 임정도 없어

1918년 12월, 천도교 최고의결기구는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짓기로 결의하였다. 겉으로는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짓는 것이었지만, 속으로는 국권회복을 위한 자금 모금에 더 큰 방점을 찍었는지도 모른다. 의암은 천도교 한 가정마다 10원 이상씩 성금을 내도록 하였다. 당시 천도교인이 3백만 명이었으니, 3천만 원을 모을 구상을 한 것이다. 당장 일경의 탄압이 들어왔다. 조선총독부는 기부행위금지법 위반이라며, 천도교가 모금한 6만 6천6백 원(한성은행 3만 원, 상업은행 3만 원, 한일은행 6천6백 원 )을 동결시켰다. 온갖 일제의 방해책동을 물리치고, 약 1백만 원이라는 거액이 모아졌다. 그 돈으로 종로구 경운동 88번지에 부지를 마련하고, 22만 원을 들여서 중앙대교당을 지었고, 그 옆의 중앙총부 건물(현재 우이동으로 옮겨져 종학대학원으로 쓰이는 건물)에 5만 원, 합쳐서 27만 원을 들였다. 나머지는 상해임시정부,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에게로 보내졌다. 1918년 12월 1일 기공식을 갖고, 1921년에 준공된 천도교 중앙대교당에 들어서니 귀국 후 가장 먼저 이곳에 들러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는 백범 김구의 육성이 들리는 듯하다.

"천도교가 없었다면 중앙대교당이 없고, 중앙대교당이 없었다면 상해 임시정부가 없고, 상해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이 없었을 것이다."

◈ 역사의 공헌, 존중해줘야

그렇게 마련된 천도교 중앙대교당 곳곳에 새겨져 있는 박달나무꽃과 무궁화꽃을 보며 생각한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감리교 9명, 장로교 7명, 불교 2명, 나머지 15명이 천도교인이다. 천도교는 국권회복을 위한 삼일운동에 돈과 인력과 조직을 바치면서 민족의 명운과 생사를 함께했고, 그로 인해 일제의 탄압 후폭풍을 맞았다. 거대한 핍박 쓰나미를 껶겪은 천도교는 일제 치하 3백만 명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십만 명대로 내려앉았다. 교세가 내려앉으면서 사회적 영향력도 줄어들었다. 힘있는 교단들은 제몫을 챙기고, 해방을 위해 작은 기여를 했어도 큰 일처럼 알리는데 천도교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상대적으로 너무 저평가되어 있지 않나 싶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서울 곳곳에 흩어져있는 천도교 성지와 그에 얽힌 비화를 들여다보면서, 또 민족의 해방을 위해 순수한 열정으로 최선을 다했던 천도교의 성지를 둘러보면서 현재의 교세로 '성지'를 부당대접하는 일, 천부당만부당한 일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종교든 역사에 공헌한 그 흔적을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정의감을 앞세우는 사회는 오지 않는다. 살아있을 때 편하고 좋은 대접 받는 데 익숙하다면, 언제든지 가정과 기업과 나라를 팔아먹는 배신자는 나타나게 되어있지 않을까.

글·사진 최미화기자 magohalm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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