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문성해 作 '아랫도리'

입력 2007-05-30 07:43:59

신생아들은 보통 아랫도리를 입히지 않는다

대신 기저귀를 채워 놓는다

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수술을 했을 때도

아랫도리는 벗겨져 있었다

할머니가 병원에서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다

아기처럼 조그마해져선 기저귀 하나만 달랑 차고 계셨다

사랑할 때도 아랫도리는 벗어야 한다

배설이 실제적이듯이

삶이 실전에 돌입할 때는 다 아랫도리를 벗어야 한다

때문에 위대한 동화작가도

아랫도리가 물고기인 인어를 생각해내었는지 모른다

거리에 아랫도리를 가린 사람들이 의기양양 활보하고 있다

그들이 아랫도리를 벗는 날은

한없이 곱상해지고 슬퍼지고 부끄러워지고 촉촉해진다

살아가는 진액이 다 그 속에 숨겨져 있다

신문 사회면에도

아랫도리가 벗겨져 있었다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걸 보면

눈길을 확 끄는 그 말 속에는 분명

사람의 뿌리가 숨겨져 있다

전철 앞좌석의 저 아가씨, 허벅지까지 올라간 짧은 치마 입고 나와서는 한사코 밑으로 끌어당긴다. 입을 때의 마음은 어딜 가고 당기는 마음은 어디서 생겨났는가. 감추려는 마음과 드러내려는 마음의 충돌, 아무래도 "아랫도리"에는 내가 모를 비밀이 숨어 있는 듯하다.

기실 "아랫도리"는 인간의 기원이자 우주의 기원. 이제 "아랫도리"는 부활해야 한다. 사람의 "살아가는 진액이 다 그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랫도리"를 영영 잊어버리고 한사코 가리려는 사람들이여, 우리가 하루에 한두 번은 반드시 "아랫도리"를 벗어야 하는 까닭을 아시는가.

장옥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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