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열 대구산악연맹고문 "산악인의 큰 미덕은 겸손"

입력 2007-05-21 07:15:12

1. 에베레스트 정상을 불과 48m 남겨두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박고문이 30년 전 에베레스트 등반을 회상하고 있다. 정우용기자 vin@msnet.co.kr 2. 1977년 한국이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뒤 환영식을 가지고 있는 박상열 대구산악연맹 고문. 박 고문은
1. 에베레스트 정상을 불과 48m 남겨두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박고문이 30년 전 에베레스트 등반을 회상하고 있다. 정우용기자 vin@msnet.co.kr 2. 1977년 한국이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뒤 환영식을 가지고 있는 박상열 대구산악연맹 고문. 박 고문은 '77 한국에베레스트원정대'의 부대장을 맡았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돌아설 수 있는 자가 가장 용기있는 산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30년 전 무리하게 감행했다면 정상에서 맞이한 것은 차디찬 죽음뿐이었을 것입니다."

한국이 세계에서 8번째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지 30주년을 맞았다. 1977년 '77 한국에베레스트원정대'(Korean Everest Expedition·77 KEE) 부대장을 맡았던 박상열(64) 대구산악연맹 고문을 17일 만났다. 그는 정상을 불과 48m 남겨둔 8,800m 지점에서 악천후와 산소 부족으로 눈물을 삼키며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는 "후배 산악인들이 왜 48m를 두고 되돌아섰느냐고 물었을 때는 답변하기도 힘들었다."면서 "그냥 먼산만 바라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1차 공격조였던 그의 '어시스트'가 있었기 때문에 고상돈 대원의 '슈팅'이 성공할 수 있었다.

박 고문은 30년 전 에베레스트 등반을 담담하게 회상했다.

"눈보라가 세차게 불던 8,700m 지점에서 셰르파와 함께 산소와 천막없이 껴안고 눈속에서 뒹굴며 잤습니다. 밤새도록 악몽과 환청에 시달렸습니다. 가슴 속에 간직했던 어머니가 주신 부적과 성경책을 만지면서 꼭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전 2시쯤 날씨가 개더군요. 발 아래 주먹만한 별들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저 별처럼 살아야겠다고 발버둥쳤습니다."

이날 박 고문에게는 희비가 교차하는 날이었다. 지난 16일 박영석 대장이 이끄는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남서벽을 등정하다 오희준, 이현조 대원 2명이 낙석에 맞아 숨졌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달 에베레스트 등정 3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위해 에베레스트를 찾았다가 박영석 대장과 만났다."면서 "올라가는 머리 숫자와 내려오는 숫자가 같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불의의 사고가 발생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며칠 전 로체 샬(8,383m)에서 등반 중인 엄홍길 대장에게 전화해 보니 셰르파가 500m 아래로 추락했다고 하더군요. 대구산악인들도 함께 등반중인데 사고없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박 고문에게 이날은 기쁜 날이기도 했다. 대구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등정 기념 5주년 다과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지난 2002년 박종철·배영록 대원이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을 때 그는 대구산악연맹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베이스캠프에서 지원했다.

"정상은 신이 허락해 줘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정상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납니다. 히말라야 등 설산을 지향하는 사람은 산에 대한 종교적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산을 신성하게 생각하고 산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는 "히말라야 등 고산 등반은 등반의 극치이지만 등산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간혹 해외등반을 다녀오지 않으면 산악인 행세를 못하는 줄 알고 많은 사람들이 고산등반을 지향하는 세태가 아쉽다는 것이다. 그는 "등산의 미덕은 자신을 낮추고 한없이 겸손해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30년 전과 비교하면 에베레스트가 많이 훼손돼 있어 가슴이 아팠습니다. 30년 전에는 한 해에 두 팀만 등반이 가능했지만 요즘엔 30개팀이 올라갑니다. 때문에 등반로가 많이 넓어졌더군요. 베이스캠프까지 8일간 걸어가야 하는데 온통 먼지가 풀풀 날리더군요. 마스크 없이는 걷기도 힘들었습니다."

최근 등산 인구가 급증하는 것도 원로 산악인으로서는 반갑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는 최근 10년 만에 황매산을 찾았다가 크게 실망했다. 등반로에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기다리면서 올랐다고 했다. 또 등산객이 많이 몰리면서 새로운 등반로가 생겨 자연이 그만큼 훼손되고 있는 것도 안타깝다. 그는 "자연휴식년제가 더 확산되고 등반로는 한 코스 이상은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에베레스트 등정 30주년을 맞은 그에게 이제 정상 등정의 미련은 전혀 없어 보였다. "에베레스트는 네팔어로 사가르마타(Sagarmatha)입니다. 하늘의 여신이라는 뜻이죠. 산을 쳐다보면 정말 신비스럽습니다.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등정을 허락합니다. 그 당시 여신은 저에게 등정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죠."

박 고문에게 '산에 왜 오르는가'라는 우문(愚問)을 던졌다. 그는 1924년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에서 실종된 영국의 등산가 말로이의 말로 대신했다.

"정상은 정복될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나를 정복했을 뿐 그곳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습니다."

모현철기자 mom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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