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

입력 2005-10-08 13:23:19

한창호 지음/돌베개 펴냄

처음 가보는 낯선 곳에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는 것. 이러한 데자뷰를 영화나 미술을 통해서 느끼기도 한다. 영화의 특정 장면이 어디선가 보았던 명화와 닮은 구석이 있다면 '영화가 그림에서 훔쳐왔구나'라고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돌베개 펴냄)'는 후발주자인 영화가 곳곳에서 미술의 아이디어를 어디서 어떻게 차용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있다.

영화와 미술이라는 시각예술의 대표적인 두 장르는 곳곳에서 서로 뒤엉켜 있다. 이 책은 감독들이 좋아하거나 영감을 얻었던 회화 예술을 영화에 어떻게 이용했는지 보여준다.

미술의 본고장이기도 한 이탈리아에서 7년간 영화공부를 하고 있는 저자가 '영화와 미술의 만남'이라는 낯선 주제로 연재했던 연재물을 정리한 이 책은 영화의 주요한 두 축인 '형식과 내용' 중 형식에 주목해 감독들의 남다른 스타일을 찾아내고 있다.

우리나라 이재용 감독의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삶의 허무'라는 테마로 작품활동을 했던 바니타스의 작품과 닮아있다. 조원은 첫사랑이기도 한 사촌 조씨부인과 내기를 한다. 청상과부인 숙부인(淑夫人) 정씨로부터 사랑을 얻어내면 조씨부인도 자신의 몸을 허락하겠다는 것. 핑크빛 이야기가 전면에 등장하지만 그 뒤에는 사랑에 포로가 된 사람들의 허무와 회환이 짙게 깔려 있다. 그것은 바니타스의 작품과도 일맥상통한다. '스캔들'에서 조원은 바니타스의 상징인 어두컴컴한 책방에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죽음의 이미지를 끌어들이고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화려한 정물은 그것 자체가 바로 바니타스의 정물화라고 해석해도 좋을 만큼 상징성이 강하다. 특히 두 사람이 사랑의 절정의 순간에 함께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의 '바닷가의 월출'을 연상케 한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작으로 유명한 '아이즈 와이드 셧'은 환영과 실재의 경계를 모호하게 지워나가면서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이미지를 빌려왔다. 황금빛으로 에로티시즘을 표현했던 클림트와 마찬가지로 감독은 영화 속 '지글러의 파티'를 시종일관 클림트의 황금색으로 꾸민다. 마치 작품 '다나에'의 제우스의 빗물처럼, 지글러의 실내는 황금 빗물이 떨어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금색의 조명들로 장식돼 있다.

영화 '배트맨'을 보면서 전통을 거부하는 미술운동 '다다이즘'을 떠올렸던 이들은 아마 짜릿함을 느꼈을 것이다.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배트맨'에서 악당 조커는 미술관에서 잭슨 폴록 같은 '액션페인팅'을 선보인다. 렘브란트, 르누아르, 베르메르 그림에 다다이스트들처럼 붓질을 하고 페인트를 칠하는 장면은 다다이즘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때로는 영화감독들은 단순히 '이미지 훔쳐오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미술에 대한 애정을 담고 존경하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하기도 한다.

미술학교 출신인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는 작품 '꿈'에서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오마주를 나타낸다. 황금빛 언덕과 강렬한 하늘색은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과 거의 흡사한 구도와 색감을 갖고 있다.

김기덕 감독도 마찬가지. 저자가 한국의 영화감독 중 가장 '미술적'이라고 평가한 김 감독은 감독이 되기 전까지 화가가 되려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런 탓인지 그의 데뷔작 '악어'부터 최근작 '빈집'까지 미술적 효과와 상징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파란 대문'에는 에곤 실레(1890~1918)의 '소녀의 누드'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 책은 무엇보다 '미술과 영화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 자체가 신선하고 영화분석은 최소화하고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형식적인 재료들, 즉 영화와 미술이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사례들을 국내외 영화 100년의 역사를 뒤져가며 충분히 제공하고 있다. 책에 실린 40편이 넘는 예술영화의 스틸과 화가들의 작품 200여 컷은 덤으로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재료들이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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