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홍경래의 난

입력 2004-12-18 12:28:59

1811년(순조 11) 12월 18일 평안도 가산 다복동에서 홍경래를 주축으로 하는 농민봉기가 발생했다. 홍경래는 평서대원수의 직책을 띠고 만 4개월 동안 계속된 반란을 총지휘했다.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직접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기도 하고 병법에도 밝아 다양한 전술로 관군과 대항했다.

봉기 초반 선전하며 5,6일 만에 청천강 이북 8읍을 점령했지만, 관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정주성으로 패퇴했다. 1812년 4월 19일 한양의 순무영 군사와 지방군 연합부대에 진압됐다. 홍경래는 교전중 총에 맞아 죽었고 주요 지휘자들은 한양으로 압송돼 참수 당했다. 난이 완전히 진압되는 과정에서 체포'처형된 인원만 2천 명을 넘었다.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커진 농민들과 차별 대우받던 서북 지방인들의 불만이 결집돼 발생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10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거사됐지만 자발적으로 세를 불려나갈 '민중적 지향점'도 이념적 구심점도 부재했다. 홍경래의 유일한 사상적 기반은 풍수. 그것은 공간적으로는 관서라는 지역주의의 한계를 노출했고 시간적으로는 중세의 봉건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었다.

스스로의 한계에 의해서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 반란은 당시 사회 발전을 바탕으로 지배체제의 외부 세력이 주체적으로 봉기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중세 말기의 지배체제붕괴 과정에서 중요한 단계가 됐다. 이후 조선 말기에 발생한 농민봉기에 여러가지로 영향을 끼쳤다.

▲1593년 조선 문신 정철 사망 ▲1865년 미국 노예제 공식 폐지 ▲1954년 '사사오입 개헌안' 국회 가결 선포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조문호기자 news119@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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