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김치 담그는 남자들

입력 2004-12-14 13:39:26

손맛·입맛·눈맛 "느끼고 싶어"

"아, 옆으로 좀 가요. 팔에 다 묻잖아. 고춧가루 양념이 이렇게 따가운 줄 몰랐네…."

지난 11일 오후 대구 대명동의 한 화실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분위기 있게 그림을 그리는 화실에서 온 팔에 벌건 양념을 묻혀 가며 김장 김치를 담그는 세 남자가 바로 주인공이었다. 매운 줄도 모르고 연신 김치 맛을 보며 어린 아이 마냥 즐거워하는 모습들…. 그림을 그리다 때아닌 구경거리에 덩달아 신이 난 학생들도 김장 김치로 라면파티를 열자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여자들도 김치를 얻어먹거나 사먹는 게 보통인 세상. 남자들이 그것도 화실에서 김장 김치를 담그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느껴보고 싶어서요."

대답은 간단했다. 고무장갑 대신 투명한 비닐 장갑을 낀 채 김치를 담그고 있던 직장인 정현(42)씨는 김치를 느껴보고 싶다고 했다.

"소금에 절인 배추에 양념을 버무릴 때의 느낌은 어떤지, 과연 여자들이 김치를 담그는 게 뭔지 올해는 꼭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은 소중히 여겨야 할 중간과정들이 모두 생략된 듯한 느낌이다. 사는 게 바쁘다 보니 김치도 공장에서 생산된 것을 사먹고…. 옛날 손이 시릴 정도로 추운 겨울 마을 아낙네들이 모여 김장 김치를 담그면서 서로 배추 속을 뜯어 먹여주며 웃고 정을 나누던 모습은 이제 아련한 추억거리가 될 정도다. 어릴 때 엄마가 맛보라며 입에 넣어주던 김치 맛은 물을 먹어도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매웠지만 얼마나 맛있던지….

높은산 화실을 운영하고 있는 김용진(44)씨는 "경기가 어려워 지난 11월 기름 난로를 연탄 난로로 바꾸면서 여럿이 모여 연탄불에 돼지고기를 구워 술 한 잔 할 일이 많아졌는데 이왕이면 김치를 직접 담가 먹으면 좋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계속했다"고 한다.

인근에서 와우화실을 운영하고 있는 이종규(41)씨도 가세했다. 일단 인터넷을 통해 자료 수집부터 시작. 검색어만 두드리니 김장 김치를 맛있게 담글 수 있는 각종 아이디어들이 수두룩 쏟아졌다. 그리곤 밥맛 좋은 단골 식당 아주머니에게 귀동냥을 하고 시장에 가서 장을 보며 알짜 정보를 모았다.

"시장 아주머니들이 처음에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더라고요. 집에서 여자들은 뭐하고 남자들이 김치를 담그냐고 말이죠."

그런데 집에 여자가 있는 사람은 김씨밖에 없으니 김치를 담글 이유는 충분해 보이기는 하다.

"우선 10포기만 담그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배추 절이는 게 제일 어렵잖아요. 초짜가 덤벼 들었다가 실패하면 다시 할 수도 없어 절임 배추를 포기당 2천200원에 구입했습니다."

이들이 배추 10포기를 담그는 데 들인 재료비는 8만원선. 김치 맛이 시원하라고 멸치액젓과 새우젓을 섞어 넣고 배, 양파 갈아 넣고 미나리, 갓, 실파, 무, 굴 등 신선한 재료를 듬뿍 넣었다. 동네 아줌마의 소개로 좋은 고춧가루를 두 근 반 구해 찹쌀풀을 넣고 양념소를 만들어 배추에 버무리자 첫 작품치고는 김치 맛이 훌륭했다.

"김치에 들어가는 재료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과정이 너무 복잡해 제대로 해낼지 걱정이었는데 맛이 좋다니 다행이네요."

이들이 담근 김치는 그림을 그리는 엄마를 따라 온 여섯 살배기 아이도 맛있게 먹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굴 넣은 김치는 빨리 먹어야 하니 그것부터 가져와요. 돼지고기 구워서 막걸리 마시며 파티합시다!"

채 뒷정리도 끝나기 전에 시작된 김장 김치 파티. 마침 훈수를 두러 온 선배 화가 구본열(52'제일고 교사)씨가 연탄불에 석쇠를 올려 고기를 구우며 즉석 '불쇼'를 연출했다.

"연탄 난로로 바꾼 후로는 한 달에 20만원 이상 절약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대명동 일대 학원가는 기름 난로를 연탄 난로로 바꾸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연탄 가격은 층수에 따라 제각각. 1층은 250원이지만 2층은 배달료 때문에 400원이다. 배달료 부담 때문에 3, 4층에서는 연탄을 때는 사람이 잘 없다고 한다.

"연탄 100장으로 한 보름 정도 때는 것 같아요. 서민들을 생각해서인지 연탄은 쓰레기 분리 수거 봉투에 안 담고 검은 봉지에 넣어 내놓으면 가지고 가니 부담이 덜 됩니다."

무 값이 한 개에 300원밖에 안 하니 농민들은 뭘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며 걱정을 늘어놓고 있는 이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연탄 난로를 들이고 술도 되도록 화실에서 먹으며 절약하고 있는 이들이 '거금'을 들여 담근 김장 김치의 느낌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영수기자 stella@imaeil.com

사진: "김장 김치를 느껴보고 싶어요." 김치를 버무릴 때의 손맛, 입맛, 눈맛을 모두 느껴보고 싶다며 김장 김치 만들기에 도전한 김용진·이종규·정현씨(오른쪽부터). 이상철기자 finder@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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