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잃고 소득없어도 "그대로 다 내라"

입력 2004-12-13 15:03:45

소득 재분배, 복지 취약계층을 위해 마련된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이 오히려 저소득 계층을 옥죄는 족쇄로 전락했다. 별반 소득도 없는데 연금과 보험료는 준조세처럼 원천징수된다. 혜택은 없는데 돈만 거둔다는 불만이 당연히 치솟고 있다. 정부와 여야는 '더 내고 덜 주자', '덜 내고 더 많이 혜택을 주자'는 논란을 벌였지만 국민연금법 개정안의 연내처리는 어렵게 됐다. 건강보험도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진전이 없다. 네 차례에 걸쳐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의 실태 및 대책을 살펴본다.

△빈곤층에 더 가혹한 국민연금

가내수공업 섬유공장에서 월 40여만원을 받고 일해오던 심모(52·여·남구 대명동)씨는 4개월 전 공장이 부도가 나 수입이 없다. 노동일을 하는 남편도 인력시장이 얼어붙어 소득이 거의 없는 상태. 하지만 연금공단 측에서는 심씨가 소득과 재산이 있는 것으로 파악, 매월 6만8천원 상당을 납부하라는 고지서를 발부했다. 수개월 동안 수입이 전혀 없었던 이씨는 결국 연금공단을 찾아가 납부예외자로 신청, 어렵게 승인받았다. 심씨는 "공단 측이 소득을 어떻게 파악하는지 몰라도 공장 부도 이후에도 소득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며 "국세청이나 세무서와 정보를 공유하지도 않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신용불량자, 비정규직 노동자, 소규모 자영업자, 장애인, 차상위계층 등 이른바 '빈곤층'에게 국민연금은 너무나 큰 짐이다. 고령화 시대를 대비해 노후생활을 보장하고 소득재분배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겠다며 지난 88년 만들어진 국민연금이 오히려 보호대상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것.

회사 정규사원이 아닌 대부분의 어려운 '약자'들은 보통 지역가입자로 분류돼 본인 소득의 8%를 국민연금으로 납부해야 한다. 사업장가입자는 본인이 소득의 4.5%를 납부하고 회사 측이 4.5%를 보조해준다. 지역가입자의 경우 최저임금,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소득으로 평균 3.5% 높은 수준의 보험료율을 적용받다 보니 당연히 국민연금 납부예외자로 신청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6개월 전 남구 대명동에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운영하던 김모(48)씨는 "수입에 비해 연금보험료가 턱없이 많아 4개월 정도 연체했는데 차압통보 고지서가 날아와 결국 사업자등록을 취소했다"며 "번호판을 떼어낸 압류 승용차도 재산으로 등록돼 있다며 연금공단 측이 매달 8만원 정도의 고지서를 보내왔다"고 말했다.

이처럼 '빈곤층'이 국민연금으로 고통받는 것은 소득 규정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전문직 종사자의 재산 및 소득신고도 불성실하며 개인재산도 일정부분 월 소득액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연금공단이 동종 사업 간 소득차이를 무시하고 사업장의 평균소득신고를 기준으로 개인의 소득을 파악하는 '동종 평균요율'을 적용해 보험료를 책정하고 있는 것.

연금공단 관계자에 따르면 "공단이 자체 개발한 '신고기준소득표'를 보험료율 산출의 기준으로 삼고 과세자료가 나타나지 않는 가입자는 상담을 통해 동산, 부동산 등을 파악해 평균 소득을 '추정'하고 있다"며 "지역가입자의 소득이 전국적으로 25% 정도밖에 파악이 되지 않는 상태"라고 밝혔다.

지난 10월 말 서울행정법원은 국민연금법 소득 규정 조항이 가입대상자의 신고 권장 소득을 편의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어 헌법상 재산권 보장 원칙에 위배될 여지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일부 의사, 약사, 변호사, 회계사 등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가 국민연금 납부기준 소득을 성실하게 신고하지 않아 기금을 마련해야 할 연금공단 측이 상대적으로 '약자'의 공적연금 부담에 고통을 가하고 있다는 오해도 받고 있다. 따라서 한 가구당 세금과 공적연금 부담 총액을 말하는 국민부담률이 저소득층 등 빈곤층에 더 크게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 지난달 국민은행연구소가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55만원 미만 최빈층의 비소비지출 비중은 97년 16.52%에서 점차적으로 올라 지난해 25.14%, 올 1/4분기에는 46.24%로 상승했다. 반면 495만원 이상 고소득층은 97년 12.51%선을 유지하며 2003년 13.40%, 올 1/4분기 14.78%로 큰 변화가 없다.

△소득도 없는데 보험료만…

건강보험 가입자들은 소득에 비해 높은 보험료 인상률과 직장-지역 가입자 간 형평성 시비를 야기하는 현행 건강보험 부과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손질을 요구하고 있다.

지역 가입자들은 피부로 느끼는 소득 증가에 비해 보험료만 매년 껑충 뛰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구당 월 평균 보험료는 지역 가입자의 경우 지난 2000년 2만4천237원에서 올해 4만9천307원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연간 보험료 상승률 6~8%는 물가상승률을 2배가량 훌쩍 뛰어넘었다. 재산·소득 과표가 조정 적용된 지난 11월에는 전국 849만 가구 중 328만 가구(38.6%)의 보험료가 올랐다.

직장을 그만두고 5년 전부터 가구소매점을 운영 중인 엄모(42·경산시)씨는 "수입은 개업 때보다 3분의 1가량 줄었는데 보험료는 2배가량 늘어난 13만2천원이나 된다"며 "정부가 물가상승률은 감안하면서 실질 소득감소는 외면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정모(54·서구 평리동)씨는 매월 내는 4만원의 보험료도 힘겨워한다. 정씨는 "아내가 파출부 생활로 버는 60여만원이 수입의 전부고 집을 담보로 잡혀 자녀 학자금을 대고 있다"고 했다.

직장 가입자들은 자영업자들의 정확한 소득파악에 실패한 정부가 보험료 원천징수가 쉬운 봉급생활자들을 '봉'으로 삼고 있다고 불만이다. 소득·재산을 근거로 보험료를 부과하는 지역 가입자의 소득파악률은 30%가량에 불과한 데다, 감사원의 '건강보험료 운영실태' 감사결과 지난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직장인들의 건보 인상률은 지역 가입자 건보료 인상률(19.7%)의 3배에 가까운 54.6%에 달했다.

반면 감정평가사, 법무사, 한의사, 변호사, 변리사, 세무·회계사 등 11개 전문직 종사자의 보험료 평균 체납률은 8.3%로 일반가입자(3.1%)에 비해 훨씬 높은 것으로 지난 10월 국정감사 결과 나타났다.

3개월만 건보료를 체납해도 발부되는 압류예정통보도 건보에 대한 저항감만 심어주고 있다.김모(29·동구 신천동)씨는 "아버지가 건보료를 체납하는 바람에 지난 5월 직장을 얻자마자 체납분이 승계돼 꼼짝없이 집을 압류당했다"고 허탈해했다. 김씨처럼 지난 2002년 7월 이후 건강보험 체납자에 대한 압류예정통보서가 발부된 것은 598만2천여건에 달했다.

연세대 정영선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현행 보험료 부과체계하에서는 소득은 떨어졌는데 보험료만 올라갔다는 지역 가입자들의 불만, 소득이 노출돼 상대적으로 높은 보험료를 물고 있다는 직장 가입자들의 불만 양쪽 모두를 해소하기 어렵다"며 "재분배 이념의 구현을 위해서는 보험료 부과체계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서상현기자 ssa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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