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겨울 산사에서

입력 2004-12-11 09:23:58

산사의 자연은 우리에게 늘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준다.

봄에는 진리의 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수행의 향기가 가득하고, 가을에는 서원의 열매가 도량을 가득 메우고, 겨울에는 성불의 꿈이 이루어져 여물어 간다.

특히 팔공산 은해사는 그 산세가 부드럽고 편안하여 사는 이로 하여금 어머니의 품속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고 마음의 고향처럼 아늑하기도 한 복스런 도량이다.

그래서인지 암자들도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 속에 품어져 있다.

머리는 비로정사요, 얼굴은 중암암(돌구멍 절), 가슴은 흥이 절로 나는 백흥암, 몸은 속세요 마음은 극락인 기기암, 몸과 마음이 구름 위의 선녀처럼 수행 정진하라는 운부암, 그리고 양손은 부처님과 보살의 자비가 중생에게 내려온 갓바위 선본사와 중생의 수행원력이 가득하여 성불을 이룬 500나한 도량인 거조암이 가족을 이루고 있다.

절이 있어 산이 살아 숨쉬고, 산이 있어 절이 더 정감 가는 이유가 아닐까. 산사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고즈넉하고 한적한 겨울 산사에서 이른 아침 혹은 저녁 해질 무렵 산책길에 나선다

화려한 꽃길도 아니다.

신록이 우거진 길도 아니다.

다양한 물감으로 채색된 단풍 길도 아니다.

졸졸 흘러내리는 계곡 물소리와 스치듯 다가서는 차가운 바람, 그리고 떨어져 뒹굴다 발아래 밟히는 낙엽소리가 내 산책길의 동반자이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소리와 그 위로 뽀얗게 피어오르는 물안개, 그리고 발아래 바스락 소리내며 부서지는 낙엽소리에 내 심성이 맑아지고, 내 귀가 맑아진다.

지난해 이맘때에도, 지지난해 이맘때에도 겨울은 왔었다.

하지만 해마다 다가오는 겨울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자연과 호흡하면서 매 순간 변화하는 계절에서 나는 윤회를 온몸으로 체감한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날 법당 앞마당을 거닐어 본다.

내 그림자가 나보다 더 큰 모습으로 내 옆에 서있다.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우주와 내가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산사에서 삶의 의미는 부처님이 나에게 주는 가치관도 되지만 나를 스님으로 있도록 하는 마음의 여유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깊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한다.

은해사 어귀에 잠시 멈추어 서면 오래된 돌비석 하나 만날 수 있다.

그 돌비석에는 누군가 새겨놓은 대소인하마(大小人下馬)라는 글귀가 있다.

큰사람이나 작은 사람이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큰 절에 가면 일주문에 들어가기 전에 만나는 것이 바로 이 돌비석이며 글귀이지만 내가 이 글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말에서 내려 걸어오라 함은 하마(下馬)비 앞에서는 나와 내가 짊어지고 있는 온갖 욕심 번뇌 망상 다 내려놓고 참 불성으로 오라 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 편리한 정보화시대에 살지만 하루하루 복잡하고 산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생활에 지쳐 밤낮이 없다.

한시도 귀와 눈이 쉴 수가 없다.

달빛 속에 내 그림자를 본 지도 오랠 것이다.

얼마 전 열반에 드신 숭산 스님은 "안으로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 안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 자기 반조가 없기 때문에 혼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법문을 남기셨다.

지금 여러 사찰에서는 새해 맞이 템플스테이 행사 준비로 바쁘다.

누구라도 잠시 속세를 벗어나 산사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법고(法鼓)와 범종(梵鐘)이 울려 퍼지는 산사 대웅전에 몸을 엎드려 자신을 낮추는 연습은 하지 않더라도, 자신을 태우면서도 소리없이 좋은 향기를 나누는 향불의 자비, 자신을 태우며 뭇 중생을 정견의 길로 인도하는 촛불의 지혜를 배워보는 여유는 어떨까.

또한 밤사이 서리 하얗게 내리는 소리, 계곡에 물 흐르는 소리, 바람에 나뭇가지 부딪히는 소리, 풍경소리와 더불어 하늘에 달님 떠오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연에 내 몸과 마음도 씻어보자.

힘든 세상 잠시라도 몸과 마음에 여유를 준다면 그래도 아름다운 사람이 많고, 아름다운 일들이 더 많아 온통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새해에는 우리 모두 더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장적 스님(대구불교방송국 총괄본부장)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