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그녀들의 꿈

입력 2004-11-25 15:37:00

1980년대초의 인기 팝송 '베티 데이비스의 눈동자'는 두 차례나 오스카상을 받았던, 할리우드 배우 베티 데이비스(1908-1989)의 전설적인 눈(?)을 다룬 노래였다. 그녀의 눈은 물론 아름다웠지만, 그러나 한창때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오드리 헵번처럼 빨려들 것처럼 고혹적인 눈은 아니었다. 악역탓인지 싸늘한 냉기에다 어딘지 사악함조차 감돌았지만 마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할리우드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전형이라 할만했다.

이미 2002년에 뉴스위크지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흑인여성'으로 극찬했던 콘돌리자 라이스. 그녀는 지금 피부색의 벽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이 됐다. 50세의 독신,그것도 흑인여성이 세계 정세를 쥐락펴락하는 미국의 외교수장이 된 점은 어느모로나 엄청난 사건이다. 벌써 힐러리 상원의원과 함께 2008년 대선 후보로 언론에 오르내릴 정도다.

라이스의 매서운 눈이 특히 인상적이다. 네오콘의 핵심 멤버답게 매의 눈처럼 날카롭다. 그러면서도 예지가 반짝인다. 그 강렬한 눈빛 속에 오늘의 그녀를 만든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그녀는 흑백차별로 악명높은 kkk단이 출몰했던 앨라배마 출신이다. 흑백분리법이 엄존했던 1960년대, 4만 여명의 흑인들이 마틴 루터 킹의 지도 아래 버스 안 흑백 좌석 분리 철폐를 위해 11개월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벌였던 그 앨라배마. 목사 아버지와 음악대 교수 어머니의 지식인 가정이었지만 그녀 역시 인종차별의 서러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언젠가 흑인도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를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딸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라이스는 이미 네 살때 첫 피아노 연주회를 선보였고, 책을 무지 많이 읽는 책벌레였다. 냉대받는 흑인이라는 현실은 어렸을때부터 '두 배는 더 열심히' 살아야함을 체득하게 했다. 흑인으로서의 한계 때문에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긴 했지만, 학자로서 정치인으로서 늘 '첫'자가 붙는 화려한 경력과 함께 쉼없이 질주를 해왔다. "집에선 로라가 아내, 일터에선 라이스가 워크 와이프(work wife)"라는 말까지 나올만큼 부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일하고 있다.

또 한 명, 라이스 못지않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흑인여성은 토크쇼의 여왕인 오프라 윈프리. 그녀의 '오프라 윈프리 쇼'는 전세계 130여 개국 1천500만 명의 시청자가 애청하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이 쇼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즉시 세간의 화제가 된다. 오죽하면 '오프라 윈프리쇼에 소개되는 법'이라는 책까지 나올까. 파이낸셜 타임스 선정 '세계를 움직이는 억만장자 25인'중 12위에 오르기도 했다. 윈프리는 대중적 인기와 돈,명예까지 두루 얻은 성공한 사람의 전형이 됐다.

역시 50세에 남부 출신. 그러나 엘리트 코스의 라이스와 달리 빈민가 출신이다. 이런 그녀의 토크쇼가 근 20년간 변함없이 인기를 끄는 비결은 다양한 삶의 경험과 높은 지성,세상을 향한 따스한 시선, 성폭행의 상처마저 드러내는 진솔함으로 닫힌 마음문을 열게 만들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은 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보다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함을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미국 주류 사회의 조건인 와스프(WASP: 앵글로 색슨계 백인 신교도)와는 거리가 먼 흑인 노예의 후손들. 그러나 한 명은 정치로, 또 한 명은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미국과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007작전과도 같은 수능부정시험의 충격 앞에 허탈해질 뿐이다.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과연 미래의 꿈이 있기는 있는 걸까. 기성세대의 잘못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냉혹한 현실을 딛고 자신의 삶을 디자인해온 라이스와 윈프리. 그런 사람들을 인정하고 밀어주는 성숙된 사회가 부럽다. 올해 윈프리 쇼의 주제는 '이루고 싶은 꿈'. 아마도 그녀들의 꿈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전경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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