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행복해지고 싶어요"

입력 2004-11-22 12:11:00

더불어 함께 사는 의식전환이 '첫단추'

사회복지시설 이전 및 신·증축이 요즘 대구 사회복지계의 최대 걱정거리 중 하나다. 올 겨울 또 다시 엄동한파를 견뎌내야 할 시설 거주자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왜 우리 사회는 시설 이전에 무조건 반대부터 할까. 시설들은 우리 사회의 눈칫밥을 먹으며 영원히 혼자만 살아가야 할까. 시설들은 과연 '혐오시설'일까. 해결점은 없는가.

◇왜 무조건 반대인가

16일 오후 음성 한센병 환자 전문요양시설인 서구 애락원. 달성군으로의 이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곳은 '절망'만 가득하다. 그동안 몇 차례 내부 수리를 거쳤지만 33명의 환자들은 무려 80년 전에 지은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옛 건물들은 벽돌이 갈라지거나 아예 뜯겨 나간 곳이 많았고 쥐가 갉아 먹은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30여년 간 생활하고 있는 유(64) 할머니는 "현대식 건물에서,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고 지친 삶을 호소했다.

정(62) 할머니는 "음성 한센병 환자들은 전염 가능성이 아예 없다"며 "우리도 행복해지고 싶다"고 절규했다.

애락원 태원선 과장은 "한쪽에선 도심 재개발을 가로막는다며, 다른 한쪽에선 혐오시설이라며 우리를 거부하고 있다. 고향은 물론 가족에게까지 버림받은 이순이 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또 한번 버림받고 있다"고 씁쓸해 했다.

애락원은 이미 20년 전 달성군 이전지의 부지 2만9천여평을 매입했고, 우여곡절 끝에 최근 달성군에 건축허가를 신청해둔 상태다.

서대구 IC와 맞붙은 영락 양로원 경우 고속도 매연 및 소음 피해 때문에 시설 이전을 추진 중이다. 현재 이전 논의를 진행 중인 도로공사 측과 협의가 끝나면 이전지를 물색해야 할 형편이다. 하지만 어디로 옮길지 걱정부터 앞선다는 것.

김현철 총무는 "이웃 시설 등의 이전 고통만 듣고 있다"며 "이전이 안 되면 50명의 치매·중풍 및 노인성 질환 노인들은 매연과 평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형편"이라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수성구의 한 중증장애인 아동시설의 경우도 20년 이상된 건물 2동의 보수에 한계를 느끼고 있다. 4년 전부터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지금껏 아무런 진척이 없다. 시설 측은 "도심 주택밀집지역에 마냥 있을 수도 없고, 옮겨야 하지만 이마저도 녹록지 않다"며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까 두렵다"고 했다.

수성구의 아시아복지재단은 이전 계획 10년 만에 꿈을 이뤘다. 재단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뚫고 나온 기분이라고 했다.

1996년 이전 계획을 세웠다. 곧바로 달성군 유가면 일대 땅을 매입했다. 설계도가 나오고, 대구시의 재산처분 허가와 교육청의 학교 이전 허가를 받는 등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건축허가만 남겨놓고 모든 법적 절차가 마무리된 것. 하지만 해당 지자체는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주민들은 2천여명의 시설 거주자들이 올 경우 생활에 나쁜 영향만 준다고 반대했다. 이전 계획은 백지화됐고,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다시 이전 계획을 세운 건 올해 초. 이번엔 팔공산 문을 두드렸다. 시행착오를 겪은 터라 인근에 마을이 없는 곳의 부지 1만2천여평을 매입했다. 그래도 민원이 있을까 봐 설명회도 가졌고, 지역 발전 약속도 했다. 드디어 지난 10월 건축허가를 받았고, 곧바로 꿈에도 기다리던 이전지 건축공사에 들어갔다. 재단 식구 2천명은 내년 2월 말이면 지상 2층의 초현대식 건물로 이사를 간다. 재단 측은 "1년 평평한 지름길을 10년 구불구불 돌길로 돌아온 기분"이라고 했다.

◇혐오시설 아니에요

"한번만 와서 보세요. 이곳이 과연 혐오시설인가요."

주민들의 반대 때문에 꼬박 2년 만에 개원한 동구의 한 노인복지시설. 취재팀은 지난 15일 이곳을 찾았다. 혐오시설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외형만 봐서는 치매, 중풍 노인들의 요양시설이라기 보다는 전원 주택에 가까웠다. 이곳엔 10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살고 있다. 물리치료실에서 만난 김(72) 할머니는 지난 20여년 간 각종 시설을 전전했지만 이곳만큼 좋은 환경은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사방 팔방으로 확 트인 공간, 막바지 단풍이 울긋불긋 자태를 뽐내는 이곳은 여느 종합병원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다.

김(75) 노인도 이곳으로 온 뒤 환한 웃음을 되찾았다. 평생 혼자 살다 2, 3년 전부터 치매증상을 보이고 있는 김 노인은 동사무소 추천으로 지난 1일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다. 중풍을 앓고 있는 김(68) 할머니는 "비록 몸은 아프지만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했다.

시설 관계자는 "이곳에서 반나절만 생활해 봐도 주민들의 인식이 완전히 바뀔 것"이라며 "주민들이 과거 수용시설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모든 복지시설을 혐오시설로 치부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수성구의 한 장애인 재활센터 또한 공주, 구미 등 전국 자치단체에서 견학을 올 정도로 수준높은 시설을 자랑한다. 6월 현재 전체 이용자 수는 5천여명으로 이 중 절반이 비장애인이다. 대구지체장애인협회 수성구지회 권재권 지회장은 "센터 시설을 이용하는 시민들 중에는 장애인 재활센터 설립을 반대했던 주민들도 포함돼 있다"며 "이제는 '내'가 왜 반대했는지 후회하는 시민들도 많다"고 전했다.

권 지회장은 "폐쇄적 수용시설만 상상하는 주민들의 선입견이 복지시설 이전이나 개원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센터에서 만난 이보경(43·동구 신서동)씨는 "반신불수인 남편은 꾸준한 물리치료가 필요하지만 장애인 재활 시설이 너무 부족해 이곳까지 찾아 왔다"며 "지역 주민들이 누구라도 늙고 병들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만 헤아려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함께, 더불어

사회복지사업법 제 6조 시설설치 방해금지 규정에 따르면 누구든지 정당한 이유없이 사회복지시설의 설치를 방해해서는 안된다. 시장·군수·구청장은 정당한 이유 없이 사회복지시설의 설치를 지연시키거나 제한하는 설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52조 벌칙 규정에선 6조 규정을 어길 경우 형사처벌토록 돼 있다.

하지만 지역 사회복지계에 따르면 국내에서 시설 설치 방해로 형사처벌된 경우는 없다고 했다.

정부와 지자체는 시설 이전 갈등이 발생할 때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는 것. '그들만의 문제'로 기피한다. 대개는 주민 반대를 이유로 시설보다는 주민들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달성군 한 관계자는 "시설 이전 경우 주민들이 반대하는 한 어렵다"며 "자치단체는 주민 뜻에 따를 수밖에 없어 건축법에 하자가 없더라도 자치단체장 재량으로 건축 신청을 불허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복지전문가들은 시설 문제에 대한 주민들의 열린 마음과 정부와 지자체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는 등 의식 전환을 바라고 있다.

달성군 사랑의 집 김성곤 원장은 "주민들의 표를 의식하는 자치단체 경우 주민들의 님비 현상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며 "주민들의 물리적 반대 시위를 제한할 수 있는 제도 보완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동구 신안복지재단 이병규 사무국장은 "현행 제도에서 국가가 하는 역할은 단지 보조금을 지급하는 데 한정돼 부지매입에서 건축 설립까지 모든 과정을 민간 자본이 부담해야 한다"며 "자치단체나 국가가 나서 지역 주민을 설득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구대 사회복지과 박태영 교수는 "노인·장애인 등 시설 거주자와 지역 주민은 서로 무관한 사이가 아니며 주민이 우리의 한 부분이라면 시설 거주자들도 또 다른 우리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시설 거주자들의 가정인 시설의 필요성을 열린 마음으로 포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시설 거주자들을 따뜻이 맞이하는 주민들의 의식 변화와 더불어 시설 및 복지행정 쪽도 시설과 주민 간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획탐사팀 이종규기자 jongku@imaeil.com 이상준기자 all4you@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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