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 케르베이커 지음/열대림 펴냄
이사짐 정리를 하다가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구석에 처 박혀 있는 빛 바랜 책을 발견하고 "언제 읽었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 해본 기억이 있다.
누구나 한번 쯤 가져봄직한 책에 관한 단상이다.
한번 읽은 책에는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책장을 지키고 있는 책에는 먼지만 쌓여 간다.
그나마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은 행운이다.
구석진 다락방에서 너덜너덜 찢겨진 채 주인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버렸거나 아니면 일찌 감치 폐기처분 되기 때문.
'어느 베스트셀러의 기이한 운명'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은 책의 일생을 다뤘다.
책이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영혼이 있고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1930년대 내가 서점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난 정말 행복했다.
시내 한 가운데에서 큰 공간을 차지할 수 있었으니 주인과 점원들이 읽어 보고 인정해 주는 그런 책들 중 한권이었다.
"
그의 독백처럼 주인공은 한때 명성을 날리던 책이다.
책의 첫 번째 주인은 열일곱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남자였다.
전쟁과 라디오에 밀려 상자 속에 들어가는 운명을 맞았다가 주인이 결혼하고 그의 부인에 의해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이 집에서 39년간을 보내며 주인의 죽음까지 지켜본다.
그 후 고물상에 팔려가서 두 번째 주인을 만난다.
독서광인 두번째 주인 집에서는 사무엘 베케트, 로브그리예, 막스 프리슈를 알게 되고 아르헨티나 작가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소설 등 전위적인 작품들도 접하게 된다.
◇ "물건이 아닌 감동을 주는 생명체"
이후 주인공은 고서점에 팔려간다.
시나리오를 쓰는 세 번째 주인집에서는 최신 기계들을 구경하게 된다.
그리고 출판 60여년이 흐른 지금 고서점에서 재활용 폐지로 넘어가는 것을 걱정하며 자신을 구해 줄 네번째 주인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사람들은 나를 입구에서 약간 떨어진 구석의 한 코너에 갖다 놓았다.
다른 서가의 책들은 나와 달리 여러 시간 동안 햇빛을 쪼이는 일이 잦았다.
나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난 재미 없는 소설이 아니다.
전성기때에는 꽤 많은 부수가 팔린 베스트셀러였다"고 회상한다.
주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서점에 당당하게 입고 되었을 때의 기쁨을 뒤로 한 채 쓸쓸히 잊혀져가는 것이 상처로 남아 있다.
이 책의 매력은 책이 자신의 신세 한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본 인간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책장을 넘기며 내용을 살펴본다.
꼼꼼하게 한 문장 한 문장씩. 언뜻 보기에도 그는 매우 체계적이다.
사실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무엇이든 선택하는 사람들처럼 그는 계속 책장을 넘긴다.
" "첫번째 주인은 채 일주일도 안 걸려 나를 읽었다.
그는 두달 넘게 나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무 곳이나 펼쳐서 한 문장 전체를 혹은 몇 줄만이라도 다시 읽곤했다"며 사람들의 독서 습관을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이 이 계절의 걸작 중 걸작인 것 같습니다.
이걸 가능한 한 빨리 쇼윈도에 놓을까 생각중입니다.
그러나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 보통때보다 통화가 훨씬 길었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1863~1938'라고 적힌 포스트에 쇼윈도 두개가 할애되었다.
" 주인공은 화려한 쇼윈도 데뷔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파시즘을 옹호한 단눈치오의 죽음으로 쇼윈도가 추도 제단으로 바뀌면서 기회를 놓쳤다는 대목에서는 책이 출간될 당시 이탈리아를 휩쓸고 있던 파시즘에 대한 비판을 엿볼 수 있다.
◇ 후 대에 반드시 전해야 할 게 있는 존재
또 "나는 헤밍웨이, 스타인벡에 버금가는 작가의 작품이다.
물론 노벨상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비슷하다.
어느날 지금 내 옆에 있는 이웃에게 그 이야기를 해 보았다.
그들은 빈정거리는 듯한 거만한 태도로 나를 바라 보았다.
그 누구보다 헤밍웨이가 심했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귀에 거슬리게 웃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케루악이리라. 그는 미국 비트 세대의 대표주자라 할 만 했는데 난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다.
" 이처럼 자신과 함께 서점에 진열되어 있던 책들과 작가들에 대한 흥미 있는 평가도 빼놓지 않고 있다.
인터넷 등에 자리를 빼앗기고 있는 책의 미래에 대해서도 걱정하고 있다.
"난 아직 줄 수 있는게 많아. 모뎀, 골뱅이(@)와 SMS의 시대라고 뭐가 다르겠어. 그래서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생각이 난 거야." 이 책의 마지막 말은 최첨단 시대에도 활자 매체의 미래는 어둡지 않고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들이 있다는 책의 존재 가치를 항변하고 있다.
저자 안드레아 케르베이커는 1989년에 사망한 베니스의 저명한 정신분석가 체자레 무자티의 장서 2천권을 고서점에서 불과 100만리라(약 50만원)에 구입하는 큰 행운을 잡았지만 비참한 책의 말로에 분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지난해 9월 밀라노 극장에서 일인극으로 상연되기도 했다.
120쪽, 9천원.
이경달기자 sara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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