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홍콩 영화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극장가를 점령하고 있을 무렵, 사람들은 당시 인기배우였던 유덕화, 곽부성, 장학우, 여명 등의 홍콩 배우를 '4대 천황'이라고 높여 불렀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요즘은 어떨까. 아시아 극장가에는 홍콩 영화의 빈 자리를 한국 영화가 대신하고 있다.
이제는 한국 배우들을 4대 천황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한석규, 송강호, 설경구, 최민식. 약속이나 한 듯 올 연말 새 영화로 나란히 찾아올 이들의 연기 세계로 떠나보자.
◇한석규 '주홍글씨'
이제 영화인생에 '10'이라는 숫자를 꽉 채운 한석규(40)가 비열한 나쁜 남자로 돌아왔다.
삼류깡패를 연기했고(넘버 3), 여자 다섯을 넘나드는 바람둥이 의사(닥터 봉), 좋아하는 여자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시한부 인생(8월의 크리스마스)과 근육보단 감성으로 승부하는 특수요원(쉬리) 등 우리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초록물고기'의 순박했던 '막둥이'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다.
그런 그가 10번째 영화로 '주홍글씨'(변혁 감독)의 기훈이라는 냉혈한을 선택한 까닭은 뭘까. "그동안 제가 했던 영화들을 보면 운신의 폭이 좁은 인물이었어요. 선한 역이 많았죠. 그래서 나쁜 캐릭터로 변신을 꾀하고 싶었습니다.
" 얼마 전 개봉한 '주홍글씨'에서 그는 욕망에 충실하나 양심의 가책은 추호도 없는 '나쁜 남자'의 가증스런 다양한 얼굴을 선보였다.
일단 평단과 관객들이 후한 점수를 줬을 만큼 조만간 '한석규가 재기할 것인가'라는 화두는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영화 '쉬리'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열어젖혔던 이 배우의 추락할 줄 모르는 내공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설경구 '역도산'
설경구(36)의 연기는 언제나 전쟁처럼 치열하다.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을 시작으로 최근의 '실미도'까지 9년 동안 13편이라는 그의 필모그래피는 지독한 열정을 가진 배우임을 잘 보여준다.
내달 15일 개봉하는 '역도산'(송해성 감독)도 마찬가지다.
그는 잊혀진 영웅 역도산을 부활시키기 위해 무릎이 휘청거릴 정도의 몸무게를 만들었고 낯선 일본어를 마스터했으며, 사각의 링 위에 수없이 맨몸을 날렸다.
"인생은 온몸을 던지겠다는 각오와 투지 없이는 결코 얻을 게 없다"는 역도산의 오랜 경구는, 설경구의 연기 인생과도 닮아 보인다.
그는 충무로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배우 중의 하나다.
어떤 역할이든 그는 좀체 흠집 낼 수 없는 완벽함을 보여준다.
역도산도 어김이 없다.
역도산의 압도적인 체격뿐 아니라 그의 복잡하고도 불안한 내면은 설경구에게 그대로 녹아든 느낌이다.
'박하사탕'에서부터 '오아시스', '실미도'와 '역도산'까지 이어지는 그의 캐릭터는 한마디로 무시무시하다.
그는 어째서 고생스런 삶의 무게를 운명적으로 떠안은 캐릭터만 고집하는 것일까. "굴곡 있는 인생을 가진 캐릭터가 왠지 좋다.
직선적이고 평면적인 인물은 매력이 없다
" '역도산'의 크랭크업 이후 '공공의 적2' 촬영을 위해 바로 체중 감량에 들어간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캐릭터 욕심이 지금의 설경구를 낳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송강호 '남극일기'
송강호(37)는 왠지 친근함을 주는 배우다.
최민식이 사람 좋은 삼촌, 원빈이 막내 동생, 설경구가 사촌형 같다면 그는 큰형의 이미지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동생들을 놀려대다가도 갑작스레 동생들을 혹독하게 다그치는 근엄한 큰형의 모습. 조만간 개봉할 '남극일기'(임필성 감독)에서도 그의 이런 이미지는 쉽게 오버랩된다.
대원들을 이끌고 도달 불능점을 향해 나아가는 최도형 대장의 모습은 친근하면서도 섬뜩한 날카로움을 던져주는 송강호의 이중적인 매력을 잘 보여준다.
그의 인기가 장수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반복하는 것 같으면서도 새로운 아이템을 추가하는 그의 연기력 덕분이다.
일단 물리지 않으니까. 그의 12번째 영화인 '남극일기'는 그에게 휴머니즘과 광기라는 새로운 메뉴를 추가시켰다.
눈보라를 헤치며 남극 한 가운데로 다가가는 그의 눈빛에서 미쳐가는 괴물로 변하는 송강호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기다려진다.
◇최민식 '주먹이 운다'
'올드보이' 촬영이 끝나고 최민식(42)은 어느 인터뷰에서 몸을 쓰는 연기는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만큼 힘든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차기작이 '꽃피는 봄이 오면'으로 정해졌을 때 그의 결심은 확고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본능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서일까. 결국 길거리에서 매를 맞아 돈을 버는 외로운 복서가 되고 말았다.
내년 봄 개봉 예정인 '주먹이 운다'(류승완 감독)에서 장도리를 쥐었던 그의 주먹에는 땀에 찌든 권투 글러브가 끼워졌다.
류승범과 연기 호흡을 맞출 그가 75㎏ 웰터급 복서로 변신한 것이다.
메가폰을 잡은 류 감독은 최민식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처음 시놉시스를 받았을 때 최민식을 떠올렸습니다.
밤새도록 거리에서 매를 맞아도, 멍투성이의 얼굴을 하고도 환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이 배역의 적임자는 최민식밖에 없지요." 머릿속으로 힘들다고 울부짖어도 몸이 먼저 빠져드는 연기, 그것이 바로 최민식만이 가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본능의 힘이 아닐까.
정욱진기자 pench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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