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수년 전 '로메로'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70년대 남미 엘살바도르의 어두운 정치상황에서 미국을 등에 업은 독재 권력에 의해 자행되던 일상적이고도 무자비한 폭력과 이에 대항하는 한 성직자를 다룬 영화라고 기억한다.
이 영화에서 그려진 폭력은 그러나 스크린 속에서, 또는 멀리 남미 어느 나라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 바로 내 이웃에게 영화보다 더 잔인한 폭력이 행해지고 있었다.
소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은 유신헌법의 공포로 민주주의를 압살하려던 박정희 정권이 만든 추악한 정치조작극임이 밝혀지고 있다.
유신정권은 1973년 말부터 시작된 학생들의 전국적 유신반대 운동을 '민청학련' 사건으로 엮고 그 배후 세력을 북한의 지령에 의하여 결성된 지하조직인 인혁당이라고 발표하였다.
관련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위법한 재판과정을 거쳐 이 중 도예종 등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이는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국제법학자협회가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지정한 1975년 4월 9일 새벽, 가족도 모르는 가운데 이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고 시신 중 일부는 고문의 흔적이 드러날 것을 우려한 정권에 의해 강제로 화장되기에 이른다.
이들에게는 국가보안법 제1조 반국가 단체의 구성, 가입 그리고 반공법 제4조 찬양, 고무 등의 규정이 적용되었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 이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묻혀져 있고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다만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를 통하여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총괄지휘로 전기고문 등 참혹한 고문 속에 수사가 이루어졌고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되었으며 각종 조서까지 변조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그러나 국정원의 비협조와 조사시한의 부족으로 그 결과가 미진하였음을 위원회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이제 인혁당 사건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통하여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야 하고 이에 따른 적절한 배상도 이루어져야 한다.
우선, 현재 정치권에서 논의가 되고 있는 '과거사관련법안'의 조속한 입법을 기대해 본다.
다만 그 과정에서 조사기관의 진상규명활동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의 조작에 관여한 자들을 구체적으로 밝혀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들에 대하여는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사법적 처벌이 힘들다는 문제가 있지만 인혁당사건은 '반인도적 범죄' 또는 '반인권적 국가범죄'에 해당되므로 공소시효를 배제하거나 정지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수 있다.
진상규명은 법원의 재심절차로도 가능하다.
사형 당한 8인의 유족들은 2002년 12월 법원에 재심청구를 제기하였다.
인혁당사건에 있어 법원은 재판과정을 통하여 독재 권력의 야만적 인권침해에 적극 협조하였다.
수년 전 한 방송이 판사 3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판사들은 이 재판이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이었음을 고백한 바 있다.
이제 사법부 스스로 이 사건의 진상을 조속히 밝힘으로써 어두운 역사를 청산하고 국민적 신뢰의 회복을 구하여야 한다.
인혁당사건은 국가보안법이 어떻게까지 악용되어질 수 있는지 그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평범한 시민들을 국가변란을 도모하는 지하당의 수괴로 만들어 사형까지 시킬 수 있는 법이 국보법이다.
그럼에도 이 법은 지금도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국보법의 존치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은 이 법이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악용된 사실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인혁당사건 등 국보법의 이름으로 권력에 의하여 자행된 인권침해 사례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진상규명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오히려 여당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는 과거사진실규명을 위한 입법에 대하여조차도 적극 반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보법을 존치시키고 그 잔혹한 피해사례에 대하여는 침묵하고자 하는 그 속마음이 무엇인지 의문이고 한편으로 두렵기까지 하다.
지난 금요일 경북대에서는 인혁당사건을 조명하는 세미나가 있었다.
그곳에서 함께한 유가족 등 관련자들의 모습은 인혁당이 지나간 역사 속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시대의 아픈 '현실'임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했다.
인혁당재건위 조작사건의 피해자 상당수가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인사들이었다.
그들의 신원(伸寃)에 이 지역 많은 이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송해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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