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기기자의 영화보기-내 머리속의 지우개

입력 2004-11-03 13:41:57

흑백 TV시절에 본 영화다.

부부가 있다.

아내는 작가고 남편은 그녀를 보살핀다.

어느 날 아내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점점 기억을 잃어간다.

마치 금방 글을 배우는 아이에게 하듯 남편은 집안의 물건에 이름표를 붙인다.

'냉장고', 'TV', '타자기'…. 어느 한 곳에서 멈칫한다.

바로 자신이다.

자신의 이름마저 잊어버리는 아내. 남편은 목이 멘다.

아내가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수상소감을 말해야 하지만, 아내의 기억력은 이미 어린 아이의 수준. 시상대에서 그녀가 객석을 향해 손짓을 한다.

누구를 부르려고 하지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잃어버린 이름을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아내. 급기야 이름을 기억해 내고 객석의 한사람을 부른다.

"아름다운 사람, 나오세요." 바로 남편이다.

주연도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미국영화였다.

사랑의 추억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흔하디흔한 '뷰티풀'이란 단어가 이때만큼 감동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이번 주 개봉하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아내 수진(손예진)도 알츠하이머병에 걸린다.

그녀를 끔찍이 사랑하는 철수(정우성)와 알콩달콩 신혼을 시작하자마자 일어난 일이다.

사랑한다는 말 한번 못해본 철수는 하늘이 무너진다.

사랑의 기억마저 잊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수진은 "행복할 때 잊자"며 홀연히 떠나고, 철수는 사랑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을 가지고 그녀를 찾아간다.

한번도 "사랑한다"고 제대로 말 못했기 때문이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최루성 멜로영화다.

최루성은 신파의 끈을 잡는다.

누가 죽고, 살아남은 이는 울고불고 하는 식이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도 마찬가지다.

'불치병 신드롬'의 연장이다.

다르다면 생명이 아니라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다.

이재한 감독은 "오랫동안 울음이 메아리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끼어드는 신파조 에피소드가 눈물샘을 꽉꽉 틀어막는 통에 머쓱해진다.

의도적이고, 작위적인 것에 워낙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일까.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슬픈 것도 예쁜 이야기가 되고마는 예쁜 배우들의 예쁜 트렌디 멜로다.

'뷰티풀'이란 단어에 집약되는 그 영화와 달리 갖가지 메타포를 깔아만 놓고 수확을 못하니 그것이 안타깝다.

filmtong@imaeil.com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