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가을이 생경한 날

입력 2004-10-09 08:55:45

'오! 이런 생경한 날이여.' 벌써 가을이 와 있다.

조석으로 달라진 바람은 '변화'가 세상의 속성임을 실감케 한다.

유난스럽게 호들갑 떨던 여름폭염도 코스모스 길섶으로 밀렸다.

오후의 태양이 뿌려 놓은 들녘, 고향의 포근한 풍요가 떠오른다.

누릇누릇한 들판 사이를 등짐지고 걷는 촌로들의 얼굴에 비치는 웃음이 미묘해 보인다.

높아진 하늘만큼 무거운 벼 이삭들은 위대했던 지난 여름이 거쳐 온 가을을 풀어 놓은 듯하다.

고등학교 미술부 시절, 한 친구를 기억한다.

재능이 뛰어나 나의 시기와 질투, 사랑을 거둘 수 없었지만 그는 오래 전 붓을 내쳐버렸다.

고단한 환경을 극복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도시의 가을이 오면 그 시절 추억에도 희미한 냄새가 난다는 걸 알겠지만, 어쨌든 그는 여전히 심약한 영혼의 소유자일 것으로 짐작된다.

개인전을 구실로 가끔 이어지는 그와 나의 미묘한 조우, 그는 그림에 대한 미련과 연민에 황망해 하지만 이제는 화가였던 이력을 서서히 지우고 있어 타성에 들러붙은 통속의 힘을 본다.

붓을 꽂고 화구통을 메고 다닐 때 즐거웠지 가장이 되어 자신의 그림에 탐닉한 절름발이를 용인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삶인들 '밥벌이의 고단함'이 없을까? 그 속내가 그리 호락호락할까마는, 그림에 매달리다 경제위기를 자초한, 아니 어쩌면 예술가들의 빵 해결은 사치같이 되어 버린 현실이 나로서는 슬퍼 보인다.

전업 작가, 이제 낯설지 않다.

그러나 더욱 슬프게도 전업 작가는 없어 보인다.

그림 그리는 일이 부업으로 치닫고 있는 듯한 세상이다.

아직 젊고 유능한 많은 작가들이 강사나 유랑푼수 같은 열악함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술의 힘을 믿으며 이 땅에 화가들이 혹독한 실험을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린다.

가을이 오면 새삼스럽게 좌절의 짧은 이력을 가진 화가가 떠올라 마음 한 구석이 온전치 못하다.

(권기철·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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