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미군문화 답사기

입력 2004-09-10 15:54:02

다큐인포 지음·북이즈 펴냄

'전쟁이 남긴 폐허 속에서 배곯았던 시절, 달콤한 초콜릿 맛을 본 적이 있나요?'

찢어진 군복을 입고 부대찌개로 한끼를 해결한 뒤 달콤한 초콜릿, 그리고 향기 나는 인스턴트 커피 한잔을 즐긴다.

카키색 군복과 초콜릿, 한 잔의 커피는 요즘 젊은이들의 자연스런 문화로 뿌리내렸지만, 전쟁을 겪은 장·노년층에겐 눈물어린 추억의 문화다.

미제(美製)로부터 이식된 문화는 이제 여과없이 우리 삶과 생활에 침투해 들어왔다.

그 밑바탕에는 50년 한국전쟁 때부터 지금까지 들어선 93개의 미군기지와 주한 미군, 그 속에서 함께 해온 기지촌 주민들이 있었다.

강력한 미제 문화는 전쟁 당시 미군의 양민학살, 미군 위안부, 미군에 의한 범죄와 환경오염 등 온갖 문제를 인식하기 어렵게 하거나 잊혀지게 만드는 방어기제로 작용했다.

'부끄러운 미군문화 답사기'는 주한미군 주둔 54년을 맞아 미군이 남긴 문화와 상처를 짚고, 미군 주둔의 문제와 원인을 분석한 미군문화 현장보고서다.

기록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다큐인포'(김규남 전준석 신동민 임진순 조현경)가 미군이 주둔하면서 남긴 잔재를 찾아 전국 미군기지 등을 1년 6개월 동안 답사한 내용을 글과 사진으로 담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부대가 있는 동네 주민들이 부대 쓰레기장에서 고기 등 먹을 수 있는 것을 골라 커다란 쇠통에 넣고 끓여먹던 '꿀꿀이죽'. 그 속에서는 가끔 미군이 쓰던 이쑤시개나 담배꽁초가 나오기도 했다.

꿀꿀이죽은 시간이 지나면서 햄 소시지 통조림 콩 치즈 등 미군부대에서 나온 음식에 고추장 김치 떡 등 한국 음식을 같이 넣고 물을 부어 끓인 '부대찌개'로 발전한다.

한국 최초의 '퓨전음식'인 셈이다.

지난해 10월 말, 서울 용산 미8군 식당에서 사병들이 먹다 남은 스테이크와 햄, 소고기를 부대찌개 집에 넘겨준 미8군 근로자들과 이들로부터 음식 찌꺼기를 넘겨받아 부대찌개에 사용한 식당업주들이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미군 PX(Post Exchange)에서 불법으로 유출된 인스턴트 커피 덕분에 대다수 국민들은 '커피는 곧 가루커피'라는 인식을 갖게 됐고, 찢어진 군복을 덧대고 꿰맨 구제(救濟)의복은 청소년들의 '멋'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비롯된 커피문화와 군복패션은 이제 일상적인 문화로 자리잡았다.

청교도주의가 강한 미국은 남성의 정력을 감퇴시켜 자위행위와 섹스를 줄여야 했고, '도덕적 범죄'인 자위행위의 예방책으로 신생아의 우멍거지, 이른바 포경수술을 권장했다.

미군이 정착시킨 한국의 포경수술은 종교적 이유로 수술을 하는 이슬람권을 제외하면 단연 시술 1위국으로 부상했다.

초콜릿과 껌, 설탕, 밀가루는 한 때 배고픔과 절망의 전후(戰後) 민중들에게 달콤한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 거대 매판자본을 키우고 자본의 역류를 가져온 부메랑이 됐다.

이 뿐이랴. 서울에 본부를 둔 AFN Korea(AFKN)는 40년 동안 돈 한 푼 내지 않고, 단 한번의 심의도 거치지 않은 채 주파수를 사용하며 미국문화의 첨병이 됐고, 고학력 비정규 노동부대인 카투사(KATUSA)는 1951년 이후 인사권과 통제권을 넘겨준 채 미군에 의해, 미군의 이익을 위해 기능하고 있다.

모두 3개의 장으로 꾸며진 이 책은 1장 '미군문화를 발견하다'에서 미군에 의해 변질된 의식(衣食)문화와 문학, 미술, 대중문화, 영화, 방송 등을 재조명하고 있다.

2장 '르포-미군기지를 가다'에서는 대구를 비롯해 동두천, 의정부, 파주, 춘천, 군산, 평택 등 전국 미군지지의 현황과 문제를 살펴보고 있다.

미군기지가 집결해 있는 일본 오키나와의 현장도 탐방하고, 미군 철수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오키나와 대학의 아라사키 모리테루 교수와의 대담을 통해 주한미군 문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3장 '미군이 남긴 상처, 오염된 문화'에서는 한국전쟁 전후로 미군이 저지른 양민학살과 기지촌 여성 문제, 혼혈인, 미군기지의 환경오염과 미군범죄, 불평등한 소파(SOFA)협정 등에 대해서 다룬다.

노근리, 제주도, 신천리 등 양민 학살 생존자들의 입을 통해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도 들어본다.

김병구기자k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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