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함께

입력 2004-08-31 09:10:03

저문다는 것, 날 저문다는 것은 마땅히 만상이 서서히 자신의 색을 지우며 서로의 속으로 스미는 일이라야 했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서로의 그림자에 물들어가는 일이라야 했다 그렇게 한결로 풀어졌을 때, 흑암의 거대한 아궁이 속으로 함께 걸어들어가는 일이라야 했다

너를 바래주고 오는 먼 밤, 제 몫의 어둠을 족쇄처럼 차고 앉은 하늘과 땅을 보았다 개울은 개울의 어둠을 아카시아는 아카시아의 어둠을 틀어안고 바윗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누구도 제 어둠의 단애 밖으로는 한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한 어둠을 손잡아주는 다른 어두움의 손 같은 건 볼 수 없었다

류인서 '어둠의 단애'

그러해야 마땅한 당위와 그렇게 되어 있는 현실 사이에서 시인은 어둠의 단애를 본다.

서로 스미는 부드러움이 시인이 꿈꾸는 당위라면 제 몫의 어둠 속에 갇힌 딱딱함이 시인이 아파하는 현실이다.

당위와 현실 사이 '너를 바래주고 오는 먼 밤'이 끼어 있다.

이것은 이 시의 창작 모티브이자 어둠의 단애를 만나게 되는 심리적 배경이다.

너를 바래주고 오는 밤은 어떤 밤일까? 왜 깊은 밤이 아니고 '먼 밤'일까? 독자 스스로 해결해보시기 바란다.

강현국(시인.대구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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